[문화예술, 성평등을 말하다] 여성영화인의 ‘든든’한 연대, 20년의 기록
[문화예술, 성평등을 말하다] 여성영화인의 ‘든든’한 연대, 20년의 기록
  • 이지혜 객원기자
  • 승인 2019.09.08 06:33
  • 수정 2019-09-08 0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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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성평등을 말하다] ④여성영화인모임 채윤희 대표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 기념행사와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가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8년 3월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를 기념해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 발표 토론회가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영화 산업이 남성 중심적으로 발전하다보니까 여성에게는 기울어진 운동장일 수밖에 없어요. 산업 내에서 여성 인력들이 활발하게 일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대신 준비위원들과 일치했던 의견이 협회 같은 이름은 붙이지 말자, 소박하게 시작하자 였는데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죠.(웃음)”

채윤희 대표가 떠올린 여성영화인모임의 시작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임순례 감독, 주진숙 영상자료원 원장(당시 중앙대학교 영화과 교수)과 진행한 포럼에서 ‘여성을 위한 영화 단체를 만들면 어떨까’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여성영화인모임은 내년이면 벌써 탄생 20주년을 맞는다.

소박한 이름과 달리 여성영화인모임 활동은 ‘여성영화인백서’ 발간부터 영화인 육아지원을 위한 정책 연구, 다큐멘터리 제작, 현장 스태프의 처우 개선 방안까지 영화 산업 전반을 세밀하고 폭넓게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성영화인력 양성을 위한 워크숍을 통해ᅠ여성들이 영화 산업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징검다리 역할도 하고 있다. 홍보, 마케팅을 비롯해 프로듀서, 프로덕션디자인, 편집 등 영화제작 전반을 다루면서 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성 영화인들이 강단에 직접 선다.

“2000년 모임을 만들 때도 여성 인력이 많긴 했지만 지금 같지는 않았어요. 영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은 많은데 어떤 분야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였고요. 여성들의 관심이 높은 홍보, 마케팅 워크숍을 열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그렇게 시작한 워크숍이 한 기수에 4~5명 현업에 진출할 정도로 취업률이 높아졌어요. 강의가 이론적이기보다는 현장에서 다루는 내용이기 때문에 현업에 바로 투입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여성영화인모임 채윤희 대표
여성영화인모임 채윤희 대표

 

2018년 상업영화 77편 중 여성 감독 작품은 단 10편

그러나 여전히 영화 산업 내에서 여성 영화인 비율은 비정상적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발표한 ‘2018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상업영화 77편 중 여성 감독이 제작한 영화 편수는 10편(13.0%)에 불과하다. 여성 제작자가 만든 영화는 15편(19.5%), 여성 프로듀서는 23편(29.9%), 여성 주연은 24편(31.2%), 여성 각본은 23편(29.9%) 정도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의사결정권을 가진 여성 영화인은 터무니없이 적다.

“영화 관련 학과의 남녀 성비를 보면 거의 5대 5예요. 그런데 졸업하고 독립영화로 들어오면 겨우 20~30%가 여성 감독이고, 상업영화로 오면 5%도 채 되지 않아요. 그 속에서 데뷔는 했지만 계속 작품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다보면 여성 감독수가 점점 줄어들죠. 여성 감독은 예술영화 위주로 작품 활동을 한다는 편견이 업계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규모가 있는 상업영화 프로젝트를 잘 맡기지 않고요. 하지만 ‘탐정 2’ 같은 경우는 이언희 감독이 연출하고 흥행도 했죠.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 감독들이 많으니까 분명 바뀔 거라고 보지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저희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꾸준히 지원하고 두드릴 것이고, 그러다보면 한 명 한 명 여성 감독들이 나타날 겁니다. 이제는 여성영화인축제만 봐도 매년 후보군이 두터워지고 있고, 수상자를 가릴 때마다 박빙입니다.”

변화는 확실히 오고 있지만 필요한 만큼 빨리 속도가 붙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영화인모임은 답답한 상황을 탓하기보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편을 택했다. 2016년,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부터 준비를 시작해 지난해 3월 개소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 그것이다. 대중문화예술계 안에서 현역이 주체가 되어 성평등센터를 세운 것은 든든이 처음. 영진위의 지원을 받아 여성영화인모임에서 운영하는 든든은 영화산업 안의 성희롱, 성폭력 예방교육과 피해자 지원을 비롯해 실태조사, 정책 제안 등을 하고 있다.

“미리 준비해서 미투 운동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사건이 생기고 거기에 대응하다보니 무엇보다 예방교육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한번이라도 성폭력 예방교육을 들은 사람들은 젠더 감수성에 대해 인지하기 때문에 예방교육을 최대한 많이 하려고 합니다. 일단 사건이 발생하면 2차 가해도 심각해지고 대부분 재판에 1년이 넘게 걸릴 정도로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 전에 예방 하는 게 중요하죠. 그러기 위해서 강사 양성에도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직장 내 성폭력 교육 갖고는 성에 차지 않더라고요. 영화 산업의 특수성이 있고 보통의 회사와는 처한 환경이 다르니까요. 영화계에 맞는 강의안이 필요하고, 영화 현장을 잘 아는 강사들을 꾸준히 재교육하면서 교육 프로그램도 업그레이드 하고 있습니다. 또 교육을 듣기 힘들 경우는 콘티북이나 시나리오북 뒤편에 성폭력 예방 수칙을 인쇄하거나 저희가 책자를 만들어서 배포하기도 합니다.”

든든은 지난해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강사를 양성하고 92건의 교육을 진행했다. 성폭력 상담은 72건으로 피해자는 배우(46명), 가해자는 감독(16명)이 가장 많았다.

변영주(왼쪽에서 셋째)감독과 배우 임수정(넷째)씨를 비롯한 ‘2012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수상자들.
변영주(왼쪽에서 셋째)감독과 배우 임수정(넷째)씨를 비롯한 ‘2012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수상자들.

영화계 성폭력 예방교육 늘리고 여성 영화인 지원 프로그램 필요

세계경제포럼 국가 중에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에 이어 세 번째로 성평등 지수가 높은 스웨덴(2018년 기준)은 영화 산업 안에서도 성평등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여기며 실제 지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성주의적 주제를 품고 있거나 제작자나 감독이 여성인 경우, 여성 스태프의 참여가 높은 영화에 대해 펀드를 마련해 지원한다. 여성영화인모임 역시 이러한 적극적인 지원 없이 성평등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일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꾸준히 놓지 않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사건이 나면 시끄럽다가 조용해지면 무관심한 식으로는 안 되죠. 그러기 위해서는 지원이 중요합니다. 든든의 경우 영진위 지원을 받으며 전문위원 2명, 행정직 1명, 이렇게 3명이 꾸려가고 있지만 우리가 해야 되는 일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입니다. 과감히 지원을 해줬으면 해요. 사건이 발생하면 외부 법률 자문, 의료 지원에 2차 가해까지 생각해야 하는데 예산에 한도가 있다 보니 피해자들을 다 지원해줄 수 없어서 안타깝죠.”

채 대표는 가장 아쉬운 프로젝트로 영화인을 위한 보육 시설을 꼽았다. 예산을 마련했으나 실행 직전 무산됐다. 그는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 단절을 겪는 여성 영화인들이 많아 도움을 줄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쉬워요.”

각자 현업을 가진 대표와 이사진이 모여 현장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하기까지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연대는 큰 힘이 된다. 여성영화인모임이 생기면서 여성영화인들의 공로를 알리고, 함께 연대하기 위해 개최한 여성영화인축제는 올해로 20회를 맞는데, 여성영화인축제를 통해 여성 영화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을 나누다보면 다시 다음 해를 해쳐나갈 힘이 생긴다고.

“참 인상적인 소감이 많았어요. 가장 주류를 이루는 건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게 힘들어서 이제 그만 둘까 생각했었는데 이 상으로 인해서 다시 힘이 난다’예요.(웃음) 시상하는 사람도 나도 그런 시절이 있어서 어렵게 버텨냈는데 이런 후배가 생겨서 너무 좋다고 화답하죠. 다같이 울고 웃고, 속마음을 얘기 한다고 할까요? ‘얼마 전에 이혼했는데 이 상을 받아서 이혼 축하 선물을 받은 것 같다’는 소감에 참 가슴이 먹먹하더라구요.“

여성영화인모임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가장 처음 보이는 인사말이 있다. “여성영화인의 권익 옹호에 앞장 서겠습니다!” 큼지막하게 힘주어 새겨진 문구는 그동안 여성영화인모임이 걸어온 발자취처럼 또렷하지만 19년 동안 여성영화인모임을 이끌어온 채윤희 대표의 소망은 대표를 그만두는 것과 여성영화인모임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사실 모임을 만들 때만 해도 대표가 될 생각도, 이렇게 오래 할 생각도 없었어요. (웃음) 이제 그만하고 다른 분에게 대표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 목표입니다. 다만 세대가 나뉘는 여성영화인들이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역할을 여성영화인모임이 해야겠지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여성영화인모임이 없어져도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으로 여성과 남성을 나눠 권익을 보호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닌 그냥 똑같은 영화인으로 인정받는 거죠. 그런 날이 온다면 저희 모임도 필요 없겠죠?(웃음)”

이지혜‘텐아시아’, ‘맥스무비’ 등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썼다. ‘뜨거운 사이다’, ‘무비스토커’ 등의 방송과 지면을 통해 여성과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고 있다.
글 이지혜 객원기자
 ‘텐아시아’, ‘맥스무비’ 등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썼다. ‘뜨거운 사이다’, ‘무비스토커’ 등의 방송과 지면을 통해 여성과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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