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가 지리산에서 불쑥 사라져버렸던 바로 전날이었던가, 아니면 전전날이었던가, 나는 또 하나의 문화 사무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늘 그렇듯이, 내 기억은 늘 줄거리를 놓친다. 내가 왜 그 날 또문 사무실에 나가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성 문체의 혁명’이라는 고정희의 발표를 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작은 세미나에 초대되었던가? 아니면, 무슨 다른 일이 있어서 갔다가 우연히 듣게 되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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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내 기억 안에서 몇 개의 선명한 이미지를 빼고는 희게 지워져 있다. 내 기억의 화면은 고정희가 서있었던 오른쪽 자리를 빼고는 어둠에 잠겨있다. 그 화면에서 나는 쭈뼛거리며 왼쪽 귀퉁이에 뒷모습으로 서있다. 그 날 내가 곤색 투피스에 흰색 티를 받쳐입고 있었다는 것, 머리는 쇼트 커트였다는 것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대체 어떤 강렬한 억압이 내 기억으로부터 통사를 빼앗아가 버리고 강렬한 단어들 몇 개만 남겨놓은 것일까? 늘 새로운 자리에 나가면 얼이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나는 그 날도 그렇게 낯가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무엇인가 마음에 박힌 가시 하나가 힘들어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또 그거 들여다보느라고 끌탕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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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또문 동인지 3호 <여형해방의 문학> 출판기념회장에서.(맨 왼쪽)

그 날 고정희는 팔을 활짝 벌리고 환하게 웃으면서 내게 말했었다. “아, 드디어 왔구나.” “드디어”라는 말이 가슴에 푹, 박혔던 것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러면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대표하고 있던 여성들의 연대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을 우정 피했던가?

이 기억은 여러 개의 버전으로 변주된다. 이상하기도 해라. 또 다른 버전에서 고정희는 낮은 스테이지 위에 올라가 있다. 화면 한가운데에 있다. 빛이 조금 들어와 있고, 그녀는 일어서 있다. 이 버전에서 그녀는 별로 환하게 웃지 않는다. 내가 그녀를 향해 다가가서 말을 붙인다. 여전히 뒷모습. 버전1에서처럼 쩔쩔매고 있지는 않지만, 쓸쓸함은 여전하다. 그런데 버전1에서도 버전2에서도 어떤 긴 나무 책상이 하나 나타난다. 그녀가 나를 안아주었던 기억이 분명히 나는데, 그런데 기억의 화면에서는 그 책상이 치워지지를 않는다. 그리고 고정희의 얼굴만 선명하게 보이고,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특유의 동그란 단발, 씩씩한 몸짓, 환한 웃음. 도대체 왜 나는 그 화면에서 지워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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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과 어울리는 고정희 시인의 생전 모습.

그 날 말고도 사실은 나는 그 전에 고정희를 여러 번 만났었다. 한국일보사 앞의 카페에서 그녀에게 내가 쓴 시를 보여주기도 했었고, 그녀의 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하고 그랬었다. 그렇지만, 그녀와는 늘 비껴 지나갔던 것 같다. 지금서, 나는 조금 이해하게 된다.

그 비껴간 시간들은,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망설임과 비참함은 내가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확립할 때까지, 내게 필요했던 시련들이었다고. 내가 좀더 용감했었다면, 내가 좀더 일찍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더라면, 그녀 앞에서 좀더 당당할 수 있었으련만. 그녀가 살아 돌아온다면, 아마도 나는 목을 놓고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내가 “드디어” 당신의 자매가 되었다고, 당신은 이제 나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고 말해주련만. 그녀가 몹시 그립다.

고정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녀의 문학에 대해서, 그녀가 남긴 말들에 대해서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정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텍스트가 된 한 생애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그녀만큼 한국문학사 안에서 스스로의 생애를 텍스트로 만드는 데 성공한 문인은 많지 않다. 그녀는 스스로의 생애를 끊임없이 좀더 높고 좀더 깊은 것으로 만들어 갔고, 그리고 언어와 생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말과 어긋나지 않는 생은 참으로 드물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한 그녀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거쳐, 이윽고 민중에 대한 논의에서마저 배제되어 있는 독립국 내의 식민지 백성인 여성들을 발견해 낸다.

그녀가 역사의 실현의 근원으로서 소환했던 기독교적 신은, 이 과정 안에서 <숨은 신>으로서의 차가움을 끝내고, 민중의 피의 제사(특히 광주의 5월) 안에서 민중-신의 모습으로 드러났다가, 이윽고 여성의 한을 통해 민속신앙적인 샤머니즘과 결합하면서 여성의 육체 안에 육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 모든 변화는 관념적 틀을 따라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몸으로 움직이는 치열한 정신에 의하여 육화된 완벽한 자기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타고난 열정적인 품성과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그녀의 리듬감각은 특히 놀랍다), 자신의 세계관을 언어로 육화시켜 나간다. 대지로부터 언어를 끌어올려, 인간의 사회적 몸 안에 통합시킨 뒤, 이윽고 천지신명과 죽은 자들의 혼에까지 다다르는 힘찬 시학. 그 시학의 밑바탕에는 생명에 대한 강한 긍정이 숨어있다. 끈질긴 생명의 잉태자로서의 여성적 운명의 전격적인 수납. 상하고 아픈 것들을 향해 지극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큰 어미의 혼.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상한 영혼을 위하여], 전문

이 지극한 사랑과 생명에 대한 절대적 긍정은 억압당하는 민중의 몸에 가해진 폭력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뒤집어 고스란히 에너지로 뒤바꾸는 놀라운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 5월 광주를 묘사한 다음의 시는 절창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오매, 미친년 오네

넋나간 오월 미친년 오네

쓸쓸한 쓸쓸한 미친년 오네

산발한 미친년 오네

젖가슴 도려낸 미친년 오네

눈물 핏물 뒤집어쓴 미친년 오네

옷고름 뜯겨진 미친년

사방에서 돌맞은 미친년

돌맞아 팔다리 까진 미친년

쓸개 콩팥 빼놓은 미친년 오네

오오 오월 미친년 오네

히, 히, 하느님께 삿대질하며

하늘의 동맥에다 칼을 꽂는 미친년

내일을 믿지 않는 미친년 오네

까맣게 새까맣게 잊혀진 미친년

이미 사망신고 마친 미친년

두 눈에 쌍불 켠 미친년 오네

철철철 피 흐르는 미친년

아무것도 무섭잖은 맨발의 미친년

아무것도 걸리잖는 미친년 오네

- <오매, 미친년 오네>, 부분

철저한 사실적 묘사로 일관하고 있는 이 시는 빠른 리듬에 실려 매우 효과적으로 역사적 폭력의 묘사를 일종의 제의적 주술로 바꾸어놓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일종의 씻김굿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이 시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할만한 문학적 성과를 이루고 있다. 첫째, 사실적 묘사를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것에 마술적인 힘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 둘째, <오매>라는 사투리, 가장 지역적인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게다가 아무 의미도 없는, 따라서 억압적인 아버지의 상징 체계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그것을 역사의 보편 원리에 통합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 <미친년>이라는 비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미친년>이라는 말에 덧붙여져 있는 사회적/성차별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걷어내고 있다는 점.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에서 고정희는 적의 무기를 빼앗아 적을 치고 있는 셈이다.

후기의 고정희는 그녀의 몸에 기록되어 있는 남도 특유의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것은, 일종의 무가(巫歌)의 형식으로 샤먼의 살풀이 구어를 복원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 둥둥 울리는 리듬은 여성의 육체를 우주의 순환에 일치시키고, 그녀들의 몸을 통해 가없이 이어지는 신적인, 비인격적인 힘의 현현을 파동처럼 드러낸다. 따라서 이제 모든 여자들은 <신의 어머니>이다.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이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 <어머니, 나의 어머니>

고정희가 아니었더라면, 한국의 여성문학은 지금의 모습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문학의 이름으로 씨를 뿌린 여성주의 운동은 문화의 각 분야에 걸쳐서 그 발아를 힘차게 보여주고 있다. 한 명의 여성이 진지한 생의 투신으로 일구어 낸 척박한 땅은 이제 풍요의 계절을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쓸쓸하다. 한국의 여성문학은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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