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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일배 52일 째인 지난 18일, 4대 종교의 삼보일배 수행 첫 번째로 불교인들의 삼보일배가 시작되었다. 사진은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 <사진·새만금갯벌생명평화 연대>

‘삼보일배’, 처절하게 아름다운 사랑

‘작은 것들의 신’들과 공존하며 섬기며

인도의 여성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을 읽은 적이 있다. 그녀의 책을 읽게 된 것은 신문 어디선가 언뜻 본 그녀의 강한 눈빛 때문이었다. 인도 여성 특유의 깊고 슬픈 듯 하면서도 여려 보이는 두 눈 깊숙한 곳에서는 강인한 영혼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소설은 나 같은 독자에게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정밀한 묘사와 인물들의 얽힘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차례씩이나 앞뒤로 책장을 넘길 것을 요구했으니까. 드디어 마지막 장을 다 읽었을 때, 내게 남은 것은 인도의 불가촉 천민 남성과 상층 계급 여성 사이의 금기를 깨뜨린 사랑이 낳은 무참한 결과였다.

얼마 후 나는 환경활동가가 된 아룬다티 로이의 글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녀는 대형 댐 건설이 갖는 폐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인도의 나르마다 강의 대규모 댐 건설 계획이 그대로 진행된다면, 강 주변 저지대의 가난한 사람들과 그 곳에 사는 수많은 생물들이 죽어가게 될 것임을 그녀는 강하게 경고했다. 그 주장을 펼치는 그녀의 문장은 훨씬 더 간결하고 명료했다.

로이는 현실 세상에서 ‘작은 것들의 신’들과 소통하며 그들과의 사랑을 금기시하는 악습과 관행에 도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받을 때, 자신이 그 소설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었기 때문에 더 이상 허구의 글은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기억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다시 떠올렸다. 깊숙한 두 눈 아래에 결코 감추려 하지 않던 강인한 눈빛. 그것은 금기의 사랑에 도전하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처절한 아름다움이었다.

갯벌의 생명체들과 공존하기 위하여

2003년 3월에서 5월, 나는 이 땅에서 또 다시 처절한 아름다움을 만난다. 새만금 갯벌 살리기를 위하여 삼보일배를 하고 계시는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몸으로 보여주시는 사랑의 방식이 그것이다. 삼보일배(三步一拜).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기. 들어올리고 내 닿는 걸음마다 온 정성을 다하시고,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무릎과 팔꿈치로 땅을 애무하며, 이마로 땅을 입맞춤하시며 일 배. 또 세 걸음 걷고 일 배, 그리고 또 일 배. 지난 3월 28일 새만금에서 출발하신 두 분 일행은 그렇게 정성스런 움직임으로 서울을 향하고 계신다. 나는 두 분을 통해서 이 시대가 금기한 사랑에 도전하는 강인한 영혼들을 보게 된다.

이 시대의 주류문화는 강한 금기의 언어로 명령한다. 나 아닌 것, 이른 바 인간이 아닌 자연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들은 언제라도 인간이 필요로 하면 도구로 사용하거나 변형할 수 있는 것들이며, 돈 되는 것으로 바꾸어야만 가치로울 수 있다고. 자연은 절대로 생명의 주체가 아니며, 더구나 상호 공존이라는 방식으로 사랑할 대상은 절대로 아니라고. 그것은 단지 철부지 사랑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갯벌은 그 곳에 서식하는 수많은 생명체들과 갯벌 주변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오염물질을 정화해주는 생태계의 중요한 순환 고리이다. 그러나 복합 산업단지 조성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현재의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하기 위해 두 분 성직자들이 택하신 방법은 논리나 수치만이 아니다. 온 몸으로 자연과의 사랑을 재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찡하다.

두 분이 택하신 사랑의 방식은 바로 ‘작은 것들의 신’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그이들을 섬기는 법(法)이다. 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 일행은 갯벌에 둥지를 틀고 사는 무량수의 생명체들, 가무락. 맛. 생합. 짱둥어. 말뚝 망둥어… 그리고 철마다 날아와 그 곳에 둥지 트는 19만 3천여 마리의 새들과 사랑에 빠졌음을 아스팔트 위에서 온 몸으로 보여주신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대표하여 이 무량수의 생명들에게 참회하신다. 자신을 비우고 그 자리에 상대에 대한 섬김을 들여놓는 사랑의 방식. 그것은 사랑이 난무하되, 소유 또는 지배라는 전횡적인 사랑의 방식으로 위안 삼으라는 전언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서 느끼는 허함을 떨쳐버리게 하는 쩌릿쩌릿함이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굳건히 믿는다. 지금은 금지된 사랑, 삼보일배라는 처절하게 아름다운 표현 방식을 요구하는 ‘작은 것들의 신’들과의 사랑. 그러나 그 사랑을 지원하는 강인하고 도전적인 영혼들이 이 땅에 무수히 있을 것이므로, 새만금 무량수의 생명체를 향한 사랑은 실현될 것이라고.

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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