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대다수가 고령이
되면서 그들의 아픔은 곧
역사의 한 장으로만 남게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20일 북한 금강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행사 당시 남측 이순규(오른쪽) 씨가 북측 남편 오인세 씨를 만나 기뻐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 2015년 10월 20일 북한 금강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행사 당시 남측 이순규(오른쪽) 씨가 북측 남편 오인세 씨를 만나 기뻐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1960년대 중후반 - 마루가 매우 차가웠던 걸로 기억되는 추운날, 어른들은 부재 중이고 5~6세 소녀가 고만고만한 언니들과 TV를 보았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둥둥하게 옷을 입고 짐 보따리를 멘 젊은 내외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에서 노모와 헤어지고 있었다. 노모를 홀로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걱정 말라며 길을 재촉한다. 당시의 어린 소녀는 드라마가 전쟁 당시의 이산가족 이야기인 줄 알 리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 손길을 타고 자라면서 든 각별한 정때문인지 온 가족이 할머니만 남겨놓고 떠나자 참기힘든 슬픔에 몸을 떨었다. 처음으로 느꼈던 쓰라린 감정때문인지 두려운 장면들로 기억에 남아있다.

1970년대 - 학교에 들어간 소녀는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르는 친구들(월남 가족 자녀)을 만났다. 전쟁과 분단으로 친구들은 조부모를 잃은 채 태어났다. 분단국가는 북에 계신 친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사조차 확인해주지 않았다. 친구들은 조부모에 대해 궁금한 게 많지만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봐 물어볼 수 없다고 했다. 이산가족의 ‘한’이 맺히면 말문을 쉽게 틀 수 없다는 것을 어릴 때 본 TV 드라마 장면으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1990년 - 소녀는 리서처가 되어서 중국의 연변대학교 초대소에 머물고 있었다. 대학 초대소에서는 정해진 시간대에 아침이 제공되기 때문에 투숙객들은 대개 식당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학회나 강의차 오는 학자들, 연구 목적으로 와있는 리서처들, 이런저런 통로로 온 중국어 전공 한국 유학생들, 간혹 기자들과 사업가들도 있었는데 이들과 달리 배경을 알 수 없는 장기투숙객이 한 명 있었다. 그가 궁금해지던 차에 초대소의 한 복무원에게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왔는데 북에 계신 어머니가 잠시 연변으로 나오셔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전쟁 때 어머니와 헤어져 월남했는데 한국에 살다간 어머니를 영영 만날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 가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의 통찰력이 빗나가지 않아 1978년 중국이 ‘개방’하고 미국인들의 중국 여행길이 열리자 그는 북한에 접경한 연변에 달려올 수 있었다. 곧 북한에 왕래하는 조선족 동포에게 부탁해서 북의 어머니를 찾게 된 그는 은밀히 어머니와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런 다음엔 어머니와 재회를 시도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어머니의 여행증을 어떻게든 만들 수 있도록 했고 중국과 북한의 국경관리들이 눈 감아주게 손을 쓰면서 어머니가 잠시 북한을 나오실 수 있도록 해서 드디어 어머니와 감격적인 만남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이후 수차례 그는 연변에 와서 어머니가 나오실 수 있도록 손을 써놓고 특정되지 않는 날, 불현듯 나오실 수 있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한 장기투숙객이 되었던 것이다.

2019년 - 60년대 추운 어느 날 TV 드라마를 보면서 슬픔에 떨었던 소녀는 프랑스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마지막 재회들’(2018)를 보았다. 송민주와 앙토니 뒤프르가 네레이션을 함께 쓰고 송민주가 감독한 다큐멘터리인데 한국에 사는 91세의 ‘어머니’가 ‘적십자’에서 편지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951년 피난 중에 잃어버린 4살의 아들이 71세가 되어 북한에서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면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편지였다. 20대의 엄마가 91세가 되어 헤어진 지 67년 만에 71세가 된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었다. 피난가면서 당시 네살의 아들은 아버지가 데리고 있었고 엄마는 갓난 딸을 업고 다른 딸의 손을 잡고 앞서가는데 뒤따르던 아버지와 아들이 엄마와 딸들을 놓쳐서 북과 남으로 헤어지게 된거였다. 만남의 장소에서 할아버지로 변해버린 아들의 머리를 끌어 안고 살가운 정을 나누다 헤어졌던 모자 이상으로 오열했다. 너무나 짧은 2박3일의 회포를 풀고 이어진 먹먹한 헤어짐의 순간, 눈물이 말라버렸을 90대 노모는 버스가 떠나도록 한손은 흔들며 다른 손으로 다시 흐르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계속 닦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서울 집으로 데려가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서울 집으로 돌아온 노모는 새로운 활력으로 식사준비를 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날을 맞는다.

수많은 개인들에게 참지 않아야 하는 고통,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면서 분단의 정치적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는 ‘국가’는 개인들의 고통에 져야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70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산가족 대다수가 고령이 되면서 그들의 아픔은 곧 역사의 한 장으로만 남게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무책임했던 국가는 반성 없이 역사의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당장 탈북민 이산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 탈북민들을 이탈 ‘범주’로 규정해서 비인도주의적으로 감시 통제하지 않고 헤어진 가족들이 자유롭게 만나고 원하는 대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정책을 실현해야만 한다.

1990년도 연변대학 초대소에 머물렀던 ‘장기투숙객’은 자신만의 노력으로 북한의 어머니와 재회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와의 모험적인 재회를 성사시키느라 들였던 물심양면의 ‘과도한 투자’로 개인의 삶이 순탄하진 않게 되었다고 들었다. 또 ‘각자도생’으로 탈북하게 된 북한주민들은 탈북 순간부터 정착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감내하기에 심히 가혹한 고통을 겪기도 한다. 기능하지 못하는 국가로 인해서 개인들이 이처럼 고통 받는 역사를 마감해야 한다. 사회가 시민들의 연대로 국가기능을 정상화할 수 없다면 ‘개인들’은 광복을 맞을 수 없다. 진정한 광복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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