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의 눈물 이야기』(개정판)
나탈리 포르티에 글·그림, 작가정신 펴냄

『릴리의 눈물 이야기』 ⓒ 나탈리 포르티에, 작가정신
『릴리의 눈물 이야기』 ⓒ 나탈리 포르티에, 작가정신

 

얼마 전 본 다큐 영화 ‘김복동’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복동 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열다섯 살 소녀가 감내해야 했던 끔찍한 폭력을 사람들 앞에서 다시금 고통스럽게 곱씹고 되뇌어야만 했다. 다시는 자신과 같은 여성 피해자들이 나타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김복동 할머니가 손을 씻으며 옷매무새를 다듬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 장면은 평소 정갈하고 자기관리 철저했던 그녀의 품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손을 씻는 클로즈 업 샷이 반복적으로 나타남으로,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 전범국가인 가해자 일본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손을 씻음으로써 무죄함을 증명했던 오래전 정결의식으로 소환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억하심정의 억울함과 참담함 속에서도, 그녀가 위안부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더 나아가 평화를 이야기하는 인권운동가로 성장하기까지, 그 지난한 과정이 따스한 눈물로 스며들었다. 고통이 힘이 되기까지, 그래서 그 슬픔을 통해 어떻게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 뿌리가 되어준 고통의 직면에 대해 영화 김복동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책 『릴리의 눈물 이야기』도 우리 안의 눈물이 어떻게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릴리 아가씨가 일하는 분실물 보관소는 사람들로 늘 분주했는데, 날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열쇠를 잃어버린 소년부터 말벌처럼 잘록한 허리를 잃어버린 뚱뚱한 아줌마까지, 그들이 잃어버린 물건은 참으로 다채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릴리는 보관소 창고에 있는 수많은 물병들을 모두 모아 바닷가로 가져가기로 결심한다. 그 물병들 속에 바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눈물이 담겨져 있었고, 아무도 자신의 잃어버린 눈물을 찾아가려 하지 않아서 창고에 눈물이 담긴 물병이 점점 늘어서 공간을 비좁게 만든 탓이다.

그런데 병 속에 있는 주인 잃은 눈물들을 남김없이 바닷물에 쏟아버리자 바닷물이 눈물과 뒤섞여 밤새 불어났고, 덕분에 다음 날 바닷가에 놀러 온 사람들이 즐겁게 수영까지 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 아무도 바라보려 하지 않았던 눈물은 바다가 되어 세상에 뜻하지 않는 즐거움을 선물해주었다. ‘로고 테라피’를 창시한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우리가 고통을 선택할 수는 없으나 고통을 받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버린 눈물을 마주했을 때, 눈물이 바다가 되고 더 이상 슬픔에 젖어 살지 않기로 릴리가 결심한 것처럼, 또 김복동 할머니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마주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인권운동가로 성장했던 것처럼.

『릴리의 눈물 이야기』 ⓒ 나탈리 포르티에, 작가정신
『릴리의 눈물 이야기』 ⓒ 나탈리 포르티에, 작가정신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것은 익히 모두가 알고 있으나, 보이지 않게 암묵적으로 묻히고 부인되어 온 진실이다. 특히 한국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특유의 ‘한’으로 전승되어 내려오지 않았나. 성 고정관념으로 다져진 관습의 코르셋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몸과 마음으로 고통 받아 온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버린 눈물이 바닷물로 다시 살아나 세상에 기쁨을 전해준 것처럼, 고통에 숨지 않고 토설하는 것은, 고통을 직면함으로써 세상에 나아가는 일일 것이다. 또한 무기력한 분노에서 벗어나 차가운 분노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어 준다. 물병 속에 담긴 수 천 가지의 눈물을 바닷물에 쏟아 붓는 순간, 릴리의 마음이 변화된 것처럼 말이다.

때론 고통은 그동안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어준다.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게 한 것이 또한 가부장제 사회의 거대한 코르셋이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그래서 고통이 야기하는 눈물들은,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릴리의 눈물 이야기』는 여성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쓰도록 권유하고 있다. 슬픔과 고통의 기억이 어떻게 단단한 힘이 되어 온전한 삶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아름답게 전해준다. 여전히 무수한 폭력에 내몰린 채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벼랑 끝에서 침묵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그랬을 때 벼랑 끝에서 작은 꽃을 피울 수 있다고, 그리하여 또 다른 차원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릴리의 눈물 이야기』 ⓒ 나탈리 포르티에, 작가정신
『릴리의 눈물 이야기』 ⓒ 나탈리 포르티에, 작가정신

 

윤정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공연을 만들어 올리는 작가다. 독서치료사로서 10년 넘게 그림책 치유워크숍 활동을 해오고 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보는 문화예술 비평 작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주요 저서로는 『조금 다르면 어때?』 『팝콘 먹는 페미니즘』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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