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김소영·변영주 감독 등
20대 여성영화인 영상 집단
여성·노동 다큐·극영화 제작

김소영 감독의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 포스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소영 감독의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의 한 장면. 여성 사무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영화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젊은 여성영화인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름은 ‘바리터’.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역경을 딛고 불사약을 구해 부모를 구했다는 여성의 고전 설화 ‘바리데기’와 장소를 뜻하는 ‘터’를 합쳤다. 여성들의 장소라는 의미다.

바리터 창립 멤버들이 모인다. 9월1일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8월29일~9월5일) 스페셜 토크 ‘바리터 30주년의 의미를 말하다’에서다. 김소영(한예종 영상원 교수) 영화 감독, 변영주 영화 감독, 서선영 작가, 김영 미루픽처스 대표, 권은선 씨, 도성희 북경연예전수학원 교수가 패널로 나선다.

바리터는 1989년 창립됐다. 당시 영화 평론가였던 김소영 감독과 중앙대 대학원생이었던 변영주 감독, 한양대 대학원생이었던 서선영 작가 등이 주축이었다. 홍효숙, 임혜원, 문혜주, 신영희 등 20여 명의 20대 영화인들이 이화여대 근처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정회원과 준회원이 있었을 만큼 체계적이었던 모임이었다.

변영주 감독은 “영화 일을 하고 싶거나 영화를 공부하는 여성들이 모여서 같이 밥 먹고 이야기도 하자고 해서 시작된 모임”이라며 “한국여성민우회의 제안이 오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바리터의 주요 활동은 노동과 여성에 관한 영상 제작 활동이었다. 대표 작품은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1990)이다. 사무직 여성 노동자 문제를 다른 38분 분량의 극영화로 바리터가 한국여성민우회와 공동 기획한 작품이다. 회사 업무와 가사노동 등 이중고에 시달리는 기혼사무직 여성 노동자와 미혼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조합결성에 참여하는 과정을 담았다.

서선영 작가가 제작 총괄·시나리오를 맡았고 김소영 감독이 연출·변영주 감독이 촬영했다. 탁아 문제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우리네 아이들’(1990)도 있었다. 1990년 3월, 일을 나간 부모들을 기다리던 어린 남매 혜영·용철 남매가 화재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제작된 작품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탁아문제 대책위원회의 제안으로 만든 4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로 도성희 교수가 연출했다. 사고 현장이 났던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의 동네를 찾아가 아이들의 일상과 탁아에 관한 활동가들 등의 모습을 담았다.

여성영화인 모임 '바리터' 창립의 주축 멤버였던 김소영(왼쪽) 한예종 영상원 교수와 변영주 영화 감독. ⓒ여성신문·뉴시스
여성영화인 모임 '바리터' 창립의 주축 멤버였던 김소영(왼쪽) 한예종 영상원 교수와 변영주 영화 감독. ⓒ여성신문·뉴시스

멤버들이 유학을 떠나는 등의 일이 겹치면서 바리터는 1992년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멈췄다. 하지만 여성 영화인들의 다양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김소영 감독은 여성문화운동 단체인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활동하면서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래머가 됐다. 김 감독은 “바리터가 해체됐다기보다는 이후 활동들의 지류가 됐다”고 말했다. 최근까지도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2017)을 연출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변영주 감독은 기록영화제작소 ‘보임’을 설립해 다큐멘터리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 ‘낮은 목소리’ 3부작을 찍기 시작했다. 김영 대표 등 영화인들은 1993년 '페미니즘 영화제'를 열었다.

변영주 감독은 “(바리터가 있을 무렵의) 한국영화의 노동현장의 임금, 노동시간을 보면 노동 착취였다고 생각한다”며 “예전에는 영화제를 하면 여성 감독의 단편을 수급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수상 감독 중 여성이 많다. 여성 감독과 스태프도 많이 늘어났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바리터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기여한 점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바리터 활동에 대한 기록들이 당시 언론 기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서선영 작가는 “자료를 보존했어야 했는데 마치 모임이 없었던 것처럼 흩어졌다”며 “영화계에서 각자 살아남는 게 어려워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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