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소란한 세상과 마주한 여중생
[인터뷰-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소란한 세상과 마주한 여중생
  • 김진수 기자
  • 승인 2019.08.20 14:13
  • 수정 2019-08-22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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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1994년 성수대교 붕괴 배경
열 네 살 은희의 시선으로
유년기 사랑·질투 등 그려
세계 15개 영화제서 25관왕
“여성의 관점 담긴 역사·
전쟁·SF 영화 만들고 싶다”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벌새는 1초에 수십 번의 날개짓을 하는 새다. 김보라 감독은 “은희가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을 계속 만나는 여정이 벌새와 닮아 있었다”고 말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유학하던 시절 중학교 3년을 다시 다녀야 한다는 꿈을 자주 꿨다. 왜 이런 꿈을 꾸게 됐을까. 기억의 조각을 맞추다 보니 유년 시절의 이야기들은 보물찾기처럼 꺼낼 것이 많다는 생각이 스쳤다. 유년기에 느꼈던 사랑, 질투, 수치심 등 다양하고 입체적인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김보라(38) 감독이 독립영화 ‘벌새’(29일 개봉)를 만들게 된 계기다.

‘벌새’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열네 살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의 성장기를 담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2011년 초등학생 은희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 영화 ‘리코더 시험’의 확장판이다. 가족에게 사랑받고 동성 친구와 남자친구에게는 따뜻함을 느끼고 싶은 어린 소녀는 삐걱거리는 관계 속에 상처를 반복해서 받는다. “관계와 단절, 억압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유를 찾아가는지 말하고 싶었어요.”

은희가 잘못한 건 없지만 세상의 일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다. 1994년이 배경인 영화에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등장한다. 무너져 가는 은희의 심리 상황을 빗댄다. “성수대교 붕괴가 은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붕괴와 이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김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등을 통해 서구에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던 중 무너진 성수대교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했다.

은희(박지후)는 끊임없는 주변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지만, 세상은 차갑다. ⓒ엣나인필름
은희(박지후)는 끊임없는 주변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지만, 세상은 차갑다. ⓒ엣나인필름

은희에게 버팀목이 되는 사람도 있다. 한문학원 선생님인 영지(김새벽)다. 겉으로는 딱딱하지만 은희에게 가장 따뜻하게 대해주는 인물이다. 김 감독이 실제로 중학생 때 다녔던 한문학원에서 만난 대학생 선생님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머리가 짧고 안경을 낀 단단한 스타일의 선생님으로 운동권”이라고 김 감독은 기억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 있었고 얄팍한 친절이 없었어요. 스쳐 지나가는 만남인데도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것을 중요하다고 느끼게 해줬어요.”

‘벌새’는 국내외 15개 영화제에서 25개의 상을 받을 정도로 평단이 주목했다. 미국 매체 ‘할리우드 리포터’는 “세심하고 날카롭고 솔직한 영화. 이 작품은 영화제를 오래 다닐 운명”이라고 평가했다.

은희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가부장제, 가정 폭력, 학벌주의와 마주친다. 은희가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부장제나 폭력이 ‘공기 같은’ 시대였어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학교나 가정이 너무 일상적이었던 거죠. 그런 억압과 폭력의 시스템 속에서 한 인간이 한 인간과 관계를 맺어가고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벌새’는 최근 개봉한 ‘밤의 문이 열린다’(유은정 감독), ‘우리집’(윤가은 감독)과 함께 영화관에 걸린다. 여성 감독의 작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한국에서는 드문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창작을 하는 건 삶을 예민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해요. 여성영화인으로서 사회의 균열을 기록하고 싶은 욕망은 있어요. 여성 영화인들은 할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해요. 다른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 개봉됐다는 게 기뻐요. 함께 잘 돼서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차기작도 여성이 주인공이다. “무엇이 될지는 운명에 맡겨야 하지만 여성의 눈으로 역사, 전쟁, SF 장르 영화를 하고 싶어요. 여성이 그리지 않는 장르라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스펙터클한 전투신이 아니라 일상의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고 싶어요.”

여성 감독으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어쩌면 ‘벌새’의 은희처럼 외로움 속에서 이뤄지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은희는 묻는다.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라고. 김 감독에게 삶 속에서 빛이 난 순간이 언제였는지 질문을 던졌다.

“제 삶의 전환점은 20대 초반에 진심으로 사귄 여자 친구들과 페미니즘 공동체를 만나면서였어요. 여자로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서로 이야기했어요. 여자 친구들과의 우정과 연대, 연결 속에서 너무 행복했어요. 제 삶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시작된 순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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