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성평등을 말하다] ②극단 신세계
여성 노예화 역사 다룬 ‘공주들’
이어 ‘이갈리아의 딸들’ 각색
젠더 이슈 담은 작품 무대 올려
성폭력·위계폭력 지침서 만드는 등
연극계 성평등 확산에도 기여

[문화예술 산업 내 성평등한 문화환경을 지원하고 조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여성문화네트워크 주최하고 여성신문 주관,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진행하는 ‘2019 성평등 문화캠페인 사업’으로 일환으로 진행됩니다.]

‘공주들’ 공연 모습. ©극단 신세계
‘공주들’ 공연 모습. ©극단 신세계

 

“복수심이었어요.” 극단 신세계의 김수정 연출가에게 연출의 시작점을 묻자 꺼내놓은 답이다. 배우와 안무가로 활동하다가 2013년부터 연출가로 활동한 김수정 연출가는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을 축소하거나 은폐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 안에 담았던 화를 테크닉 없이 그대로 꺼내 보인다. 그것을 예술적으로 미화시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화가 많이 나있었어요. 여자 배우일 때는 그냥 배우가 아니라 여자가 붙는 배우라서 차별받고, 여자 안무가일 때는 여자 안무가의 역할을 요구받고, 여자 연출가니까 또 저한테 원하는 역할이 따로 있더라고요.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을 다 경험한 거 같아요.(웃음) 여자 배우일 때는 순종적인데 섹시하길 바라고, 안무가일 땐 부드럽지만 톡 쏴주길 바라면서 섹시함을 원하고요. 그런데 여자 연출가로 넘어가니까 이번엔 명예남성이길 원하더라구요. 그렇게 계속 차별 받아왔던 거 같아요. 지금은 안 받을까요? 지금도 받죠. 누군가는 계속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다른 고통을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정확히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고통을 아름답거나 장식적이지 않게 있는 그대로 극으로 풀고 싶었고, 그 방법밖에 몰랐어요.”

극단 신세계의 작품들은 애둘러 가거나 뭉뚱그리지 않는다. 무엇이 포르노인지 묻고 정의 내리는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폭력에 노출되고 중독되어 있는지 체험시키는 ‘그러므로 포르노’는 적나라한 표현 방식으로 관객들이 “이 상황 자체가 너무 폭력적이다”,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호소할 정도다. ‘시선 강간’을 배우의 옷에 물감이 뿌려지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묘사했고, 타인의 불행을 먹어치우겠다며 수십 리터의 물을 마시는 배우를 보며 관객들은 불편해한다. ‘공주들’을 향한 목소리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불편’이다. 일본군 ‘위안부’를 시작으로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 주한미군 ‘위안부’, 기생 관광, 현재의 성매매 여성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나서서 체계적으로 여성을 노예화한 역사를 다룬 ‘공주들’의 목소리는 미투 운동까지 이어진다.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무대는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지만 관객과 평단은 반응은 뜨겁다. 올해 서울연극제에서 ‘공주들’은 우수상과 함께 100명의 관객군단이 선정한 인기상 ‘관객훈장’을 수상했다.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헤집는 거지만 불편을 마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다시 반복되지 않으니까요. 저희 극단 이름이 신세계이긴 하지만 새로운 세계는 없다고 생각해요. 새롭게 사는 방법만 있을 뿐이죠. 그래서 너희 작품으로 세상이 바뀌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내 얘기가 먹히지 않을 거라고 해서 끝내면 진짜 끝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계속 얘기하고 있다면 끝나지 않아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계속 불편하게 만들기를 하고 있습니다.”

극단 신세계는 공동 창작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연출가가 혼자 극본을 쓰고 일방적으로 배우가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원 모두가 참여하고 합의해나가면서 작품을 완성시킨다. 공통 텍스트를 정하고 나면 다 같이 읽은 뒤 개념을 정리하고 주제를 정한다. 이야기를 나열하면서 김수정 연출가가 초고를 써오면 그걸 가지고 단원들이 각자 연출하는 과정을 몇 주 동안 진행한 뒤 원고들을 취합해서 최종 대본이 나온다. 한 작품을 만들 때 70~80개 정도의 장면이 만들어지는데 김수정 연출가가 쓴 부분은 12~15개 정도라고. 김보경 부단장이 “연출님이 자기 작품이라고 하면 화가 나요.(웃음) 우리 작품이거든요”라고 할 정도로 배우들의 작업 만족도와 애착이 상당히 높다. 이 과정에서 김수정 연출가는 다양한 의견을 합치고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연출의 개념이 많이 바뀌었어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프로덕션의 방향성 제시하는 사람으로요. 서로 믿는 관계가 형성되니까 편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장면이 나와요. 혼자 창작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 힘이 크구나 느낍니다.”

극단 신세계를 이끄는 김수정 연출가. ©극단 신세계
극단 신세계를 이끄는 김수정 연출가. ©극단 신세계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스트레스도 더해지지만 토의해나가는 과정에서 단원들 스스로 긍정적으로 변하는 부분이 더 많다고. 여성이 피해자로 놓인 현실을 고스란히 가져온 극 안에서 가해자를 연기하는 남성 배우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전과는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너는 가해자라고 두고 나서 작업을 한 적이 없어서 토의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남자만 가해자인건 아니고 여자도 가해자 역할이 될 수 있고, 피해자 역을 맡은 사람도 스스로 누군가에게 가해를 하는 형식을 취해서 인물들 간에는 나는 피해자, 너는 가해자라고 나누지 않으려고 했어요. 다만 2018년 미투 운동 이후부터는 작품을 하면서 남자들의 사고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물론 되게 완만하게, 절대 한 번에 뒤집히는 사람은 없죠. 남성 배우들이 작년에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남자가 잠재적 가해자다, 였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말을 뱉진 않아요. 잠재적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인지하기 시작한 거죠.”

사회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고 있지만 창작 과정에서는 누군가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단원들의 노력이다. 극단 신세계는 나이가 많든 적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서로가 가진 차이로 인해 차별받는 상황을 없애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였다.

“하나의 문제를 놓고 서로의 의견을 묻고 한 곳으로 간다는 게 쉽지 않은데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요. 저희는 발언할 때 타이머를 작동시키는데, 무조건 3분 안에 이야기를 끝내게 하죠. 그러면 누가 덜 말하지도 더 말하지도 않게 되고요. 이렇게 충분히 이야기 나누는 시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불편할 때 불편하다고 말하기 입니다. 누군가 불편하다고 말하면 연습이 중단되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으면서 쉬는 시간을 가져요. 타인에게 내가 불편함을 주고 있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어서 시작하게 됐죠. 이러다보니까 저도 참고 넘어갔던 많은 것들을 얘기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직도 열에 다섯 번밖에 못하지만요. (웃음) 저는 굉장히 큰 모순덩어리예요. 작품과 저의 삶은 다른데, 작품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게 다들 습관이 되어서 극단 말고 일상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요. 서로 얘기하고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말하면 해결 될 거 같거든요. 불편함의 일상화를 제안하고 싶어요.”

극단 신세계의 연습실 벽에는 공동 작업을 할 때 유의해야할 사항들이 붙어있다. ‘소규모 장면 연습 시 반드시 객관화 인원 배치하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폭력/노출/욕설이 있을 시 양해 구하기’처럼 구체적으로 방법이 제시된다.  ©극단 신세계
극단 신세계의 연습실 벽에는 공동 작업을 할 때 유의해야할 사항들이 붙어있다. ‘소규모 장면 연습 시 반드시 객관화 인원 배치하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폭력/노출/욕설이 있을 시 양해 구하기’처럼 구체적으로 방법이 제시된다. ©극단 신세계

 

극단 신세계의 다음 작품은 페미니즘 입문서로 불리는 ‘이갈리아의 딸들’이다. ‘이갈리아’는 남성이 집안일과 육아를 하고, 모든 경제활동을 여성이 책임지는 나라로 이 나라의 여성과 남성은 차별과 혐오로 자연스럽게 강자와 약자로 구분된다. 성별과 계급 등 사회에 스며있는 차별적 요소와 문제로 평등한 사회란 무엇인가 묻는다.

“그렇게 유명한 작품인지 몰랐어요.(웃음) 이 작품을 선택할 당시 저의 젠더 감수성이 크지 않은 상태였는데 작업을 하면서 거의 1년 넘게 붙들고 있다 보니 지금은 뼛속 깊이 들어와 있어요. 제가 젠더 이슈를 공부 하면서 들었던 개념들이 일상생활에 적용이 되기 시작했죠. 불편하고 힘들었던 것들이 다 젠더에 연결 돼있다는 걸 알게 되고 방향성이 명확해졌죠. 실은 ‘공주들’과 ‘이갈리아의 딸들’이 다른 작품이 아닌 거죠. 요즘 관심 있는 작품은 ‘여자는 인질이다’입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을 가부장제와 연결시킨 이야기인데 제 생각을 많이 바꿔 놓았고, 처음 ‘나쁜 페미니즘’을 읽었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 다음은 퀴어 이야기까지 넘어갈 거 같아요.”

극단 신세계의 창작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젠더 이슈는 무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극단의 운영에 있어서도 영향을 끼치는데, 성평등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단원들 모두 힘을 모았고, 그 역시 창작 가이드처럼 구체적이다.

“최근에 극단 내부에서 쓸 성폭력, 위계폭력 지침서를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알게 된 게 내가 피해자일 때와 가해자일 때, 주변인이 됐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모르고 있더라구요. 교육 받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각 상황에 대한 스코어를 다 만들어 놨어요. 그걸 프로덕션에 들어갈 때마다 다시 읽는데 맨날 새로워요. 다른 자료들도 참고하고, 팀원들 전체가 각자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만들었는데 저희한테 소중한 지침입니다. 작년 이후로 국공립 단체에서는 일부 그러한 지침을 만들긴 했는데 저희가 좀 유난한 편이죠.(웃음) 지금도 매번 번거롭고 귀찮은데 해보려구요. 그리고 표준계약서도 단원들 모두 작성하고 있어요. 아직은 국공립 단체나 큰 기업과 연관된 곳에서만 하고 있는데 저희처럼 작은 규모의 극단들도 표준계약서나 성폭력 지침서가 평균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하고 있는 것들이 다른 극단에도 공유되면 그것이 저희가 연극계의 성평등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식이 아닐까 싶어요.”

이지혜‘텐아시아’, ‘맥스무비’ 등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썼다. ‘뜨거운 사이다’, ‘무비스토커’ 등의 방송과 지면을 통해 여성과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고 있다.
이지혜‘텐아시아’, ‘맥스무비’ 등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썼다. ‘뜨거운 사이다’, ‘무비스토커’ 등의 방송과 지면을 통해 여성과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고 있다.

 

필자 이지혜 객원기자
'텐아시아', '맥스무비' 등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썼다. '뜨거운 사이다', '무비스토커' 등의 방송과 지면을 통해 여성과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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