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부산, 창원, 수원 등 전국 각지의 여성공익활동가 12명이 지난 6월 7박9일 일정으로 ‘짧은 여행, 긴 호흡’ 사업 통해 독일을 다녀왔다. 교보생명이 2004년부터 후원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의 여성·시민사회 운동과 민관협력체계를 돌아보았다.]

여성 공익활동가 12명은 ‘짧은 여행, 긴 호흡’ 사업을 통해 휴식과 함께 독일 여성운동 현장을 직접 경험했다. ©한국여성재단
여성 공익활동가 12명은 ‘짧은 여행, 긴 호흡’ 사업을 통해 휴식과 함께 독일 여성운동 현장을 직접 경험했다. ©한국여성재단

 

“이거 뭔가 오류가 있는 거겠지?” 연수 전에 독일 날씨 예보를 찾아보니 최고 기온 39도라는 거다. 틀린 정보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가 내내 우리와 함께했다. 그렇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서늘해지는 건조한 공기, 끝없는 포도밭과 마을을 휘감아 도는 모젤 강의 경탄스런 광경, 무엇보다 몰아치는 일상 업무로부터 격리되어 새로운 환경에 놓인 일주일은 그 자체로 넘치는 휴식과 충전의 시간이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최근 선거에서 녹색당이 두드러진 약진을 보인 트리어 시에서,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은 유럽의 현실을 체감했다고나 할까? 그 더웠던 날들도 아련하게 그립기만 한 걸 보니 쉼이란 게 참 좋긴 좋다.

12명의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저마다의 호기심을 장착하고 6곳의 기관을 방문했다. 라인란트 팔쯔 주 정부 여성가족부 하이케 융 박사, 트리어 시 안젤리나 빈터 여성정책 담당관을 만나 여성정책 전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여러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일 적십자사 장애인 작업장, 카톨릭 여성사회서비스 기관 시설을 라운딩하며 민간영역과 정부가 어떻게 협력하는지, 당사자들의 일상은 어떠한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트리어 대학 사회학과 한스 브라운 교수로부터 독일 여성운동의 긴 역사와 최근 쟁점에 대해 듣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녹색당 카롤리네 뷔르츠 시의원을 만나 녹색당의 여성정책과 의회 내 성평등을 위한 노력에 대해 들었다. 정부, 정당, 학자, 여성 지원시설, 장애인 작업장 등 다양한 접점을 통해 정책의 방향과 원칙, 실행 주체의 역량과 자원, 구체적 아이디어의 적절성 등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궁금한 게 많아져 시간이 짧은 게 아쉬웠지만, 어느 것 하나 깊이 파고들자면 끝도 없을 것이기에 여러 영역을 두루 접하는 장점을 취하는 데에 집중했다.

독일 라인란트 팔쯔 주 정부 여성가족부를 찾아 여성정책 전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여성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여성재단
독일 라인란트 팔쯔 주 정부 여성가족부를 찾아 여성정책 전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여성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여성재단

 

한국사회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독일도 가사‧양육노동이 기본적으로 여성 몫이라는 고정관념이 여전하여 성별 임금격차와 유리천장 문제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문제가 여성 생애 전반에 걸친 불평등과 삶의 질 저하에 직결된다는 것을 공무 담당자들이 명확히 인지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비교적 손쉽고도 생색내기 좋은 ‘여성지원’ 정책이 아닌 성역할 해체나 보육에 대한 사회책임 강화 등 구조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분명한 방향설정이 인상적이었다. 느리더라도 정확한 지향에 따라 일관된 정책을 집행하는 긴 세월이 쌓인다면 유의미한 변화가 이뤄지리라는, 지금까지 독일 사회가 일궈 온 변화의 과정도 그러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중지와 관련하여 한국에선 독일 사례가 마치 합리적인 대안인 양 언급되곤 하지만, 실제로 독일의 임신중지법은 우리가 만난 독일 공무원조차 ‘중세시대나 다름없다’고 악평할 정도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이다. 트리어 시에는 임신중지 가능한 병원이 한 곳도 없으며, 라인란트 팔츠 주에서 최근 임신중지 시술 광고를 내건 의사가 처벌받은 일로 관련법 개정을 위한 대중 시위가 일어난 바 있다고 한다. 성매매 합법화 이후의 관련 실태에 대해서도, 작년 연수팀이 방문하고 기록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부정적 평가가 강해졌다고 느꼈다. 주 정부 담당자는 합법화가 목표했을 성판매 여성의 권리 보장은 요원한 채, 확장된 성산업 안에서 폭력과 착취 여부가 파악되지 않는 영역이 많다고,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일각의 평가로 전체를 판단할 순 없다. 하지만 분명히, 여성인권과 관련한 법‧제도에 관해 보다 구체적인 현황과 시민사회의 역동이 어떠한지 면밀히 검토하고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뿌리 깊은 성차별이 발현되는 방식은 흡사하고, 연수팀으로선 독일은 그래도 어떻게 이 정도까지나마 개선될 수 있었는지 누차 질문하게 되었다. 여러 버전의 질의응답을 거치며, 뾰족한 묘책은 있을 수 없거니와 변화의 계기는 복잡다단하게 맞물려 작동하고, 한국과 독일은 애초 사회 풍토나 개인의 의식 구조 자체가 달라서 변화를 향한 길도 다르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우리는 독일의 과거가 아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붙들고 고민하는 것과 똑같은 쟁점을 동시대 독일의 20대 페미니스트 시의원이 이야기하는 모습, 게다가 독일에서도 여전히 결론짓지 못하고 논의 중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답하기 어려운 문제와 풀기 어려운 갈등 앞에서 스스로의 자질을 의심하기보단, 아주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고민하며 새로운 길을 내려고 시도 중임을 기억하고, 한국에서도 그 중 하나가 될 잠정적인 경로를 개척해봐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녹색당 소속 카롤리네 뷔르츠 시의원을 만나 녹색당의 여성정책과 의회 내 성평등을 위한 노력에 대해 들었다. ©한국여성재단
녹색당 소속 카롤리네 뷔르츠 시의원을 만나 녹색당의 여성정책과 의회 내 성평등을 위한 노력에 대해 들었다. ©한국여성재단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단체 활동가로서 그 흐름에 잘 조응해야 한다는 게 때론 무거운 과제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른 사회에서 더 오랜 기간, 부침이 있었지만 끊임없이 이어져 온 여성정책과 운동, 그리고 여전히 남은 많은 문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한 고민들을 들으면서, 눈앞의 과제에 좀 더 거리를 두고 긴 호흡으로 사고할 시야와 힘을 얻는 느낌이었다. 원하는 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이뤄지지 않더라도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 지속하는 게 중요하다는, 우리는 나름대로 잘 해나가고 있다는 믿음을 다시 다질 수 있었다.

연수팀 멤버들을 처음 만났지만 여성단체 활동가라는 공동의 배경 덕분에 비슷한 가치관과 서로에 대한 이해 속에서 즐겁고 편안하게 함께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이동 중에, 식사시간마다 전국 각지에서 온 활동가들의 경험, 고민, 관심사를 각양각색으로 들었는데, 서로 굉장히 비슷한 부분도 있는가 하면 또 전혀 다른 현장에서 운동을 펼치고 있기도 했다. 모두가 이 골치 아프게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놓지 않고 분투하고 있다는 생각에 존경심과 동지애가 솟았다. 여성운동의 ‘동료들’을 생각할 때 내가 속한 단체의 활동가들 외에도 전국에 흩어져 각자의 운동을 지켜나가는 연수팀 사람들을 떠올리며 든든해할 수 있게 된 것이, 독일에서 경험한 그 무엇에 못지않게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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