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여성운동 탐방기

[강릉, 부산, 창원, 수원 등 전국 각지의 여성공익활동가 12명이 지난 6월 7박9일 일정으로 ‘짧은 여행, 긴 호흡’ 사업 통해 독일을 다녀왔다. 교보생명이 2004년부터 후원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의 여성·시민사회 운동과 민관협력체계를 돌아보았다.]

지난 6월 ‘짧은 여행, 긴 호흡’ 사업에 참여한 여성공익활동가들. ©한국여성재단
지난 6월 ‘짧은 여행, 긴 호흡’ 사업에 참여한 여성공익활동가들. ©한국여성재단

지난 3월 교보생명이 후원하고, 한국여성재단에서 진행하는 여성공익단체역량강화지원사업 ‘짧은 여행, 긴 호흡’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NGO활동가로 살아온 시간을 되짚어 볼 기회를 얻었다. 14년간 여성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여러 리더십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NGO활동가들에게 유럽 해외 연수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 행운이라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와 함께 동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도 유럽은 처음이라 준비하는 내내 설레었다. 서울, 부산, 울산, 창원, 수원, 강릉, 천안 등 7개 지역에서 여성·가족 상담, 가정(성)폭력 상담, 젠더연구, 장애인, 여성긴급전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활동가와 함께 하는 연수이다 보니 기대감과 더불어 약간의 긴장감도 있었다.

연수팀이 방문한 트리어(Trier)는 독일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서로마 제국 시절 수도인 만큼 고대로마의 유적지가 많은 지역이다. 검은 문(Porta Nigra), 로마 시대 목욕탕, 황제 알현실이 있던 바실리카와 대성당 등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건축물이 많다. 풍부한 문화시설과 행정구 트리어의 주요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어 오래된 것과 현대적인 것의 오묘한 조화가 너무나도 매력적인 곳이다. 오래된 건물과 유적들이 주는 느낌 덕분에 과거와 연결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성을 절로 되묻게 되었고, 지금 독일 여성의 현실을 마주하며 한국의 보다 나은 삶을 모색하는 질문들이 만들어 갈 역사가 기대되었다.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보장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5년간 라인란트 팔츠 주 정부 여성부에서 일하며, 연방정부는 물론 NGO와도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는 여성부 하이케 박사와 트리어 시청 안젤리카 빈터 여성정책 담당관(부시장급)을 만났을 때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시의원을 겸하고 있는 22세 여성 카롤리네 뷔르츠와의 만남에서는 여성과 청년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어야 하는 이유와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트리어 대학 사회학과 한스 브라운 교수와의 만남에서는 참정권 제정 운동을 시작으로 한 여성운동의 뿌리와 나아갈 미래에 대한 혜안이 담긴 메시지에 깊은 울림을 느꼈다. 카톨릭 여성회, 독일적십자장애인 작업장을 방문했을 때는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사회서비스 지원 시스템과 예산 규모에 놀라움을 느끼며 우리나라의 여성 쉼터, 장애인 복지서비스 기관 운영 방향을 고민하게 되었다.

독일 적십자가 운영하는 장애인 작업장을 견학하는 활동가들.  ©한국여성재단
독일 적십자가 운영하는 장애인 작업장을 견학하는 활동가들. ©한국여성재단

모젤 강을 따라 양쪽으로 펼쳐진 비탈진 포도밭,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바로크, 로코코 양식 웅장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은은한 빛이 주는 경건함, 방문했던 기관과 숙소에서 체험했던 에너지 효율이 높은 건축 구조와 절제하는 생활 모습은 평온한 휴식의 한가운데 진하게 남겨져 있다. 아름드리 나무가 즐비한 강변에서 캠핑과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먼 산 풍경으로 바라다 보이는 풍력발전기, 주택가 지붕 위로 보이는 태양광 발전기에서 난개발의 흔적을 볼 수 없는 자연과의 조화로움이 놀라웠고, 35℃를 넘는 기습 폭염에도 에어컨과 선풍기조차 틀지 않는 식당들을 경험하며 저절로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를 짚어 보게 된다.

우리가 묵었던 메링(Mehring)의 게스트하우스는 휴양지여서 조용한 목가적 풍경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테라스에서 아침저녁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고, 밤이면 쏟아지는 별 아래서 함께 한 이들과 와인 잔을 기울이며 그날의 자잘한 웃음, 현장의 삶과 고민들을 나누던 시간이 행복한 기억이 되었다. 이른 아침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포도밭 사이 넓게 자리한 예쁜 주택 사이를 걸었고, 자기만의 개성이 담긴 정원을 구경하던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고즈넉했다. 바쁘게 달려가던 일상을 멈추고, 시대와 지역의 경계 넘어선 여성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그 시간이 돌아보니 쉼이었고, 돌아와 마주한 일상들이 간절하게 소중해지는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토론과 추억을 함께 한 14명의 활동가들과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준 한국여성재단과 교보생명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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