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속에서 기쁨을 찾고 문학속에서 꿈을 찾다

19세기 유럽과 러시아의 수학계와 지성계에서 학자로서, 문필가로서, 그리고 사회운동의 선구자로서 그가 누려온 명성과 존경은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에 못지 않다. 여성의 대학입학조차 허용되지 않던 시절 그 첩첩의 바리케이드 앞에서 도전해보기도 하고 좌절을 겪기도 하면서 마녀나 악녀 취급을 받았던 그 여자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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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기 쉬운 내면의 감성적인 천재 여성

학문적 성취와 가족에 대한 책임 사이서 갈등

유럽에서 68년의 ‘빅뱅’ 이후 페미니즘도 실사구시 차원에서 다양한 아젠다 설정에 들어갔다. 80년대 독일에서 여성 작가와 학자들 중심으로 역사 속의 여성들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시작됐는데, 그 주축을 이룬 여성들도 이른바 68세대였다. 좌파학생운동이 독일과 프랑스와 미국을 동시다발로 휩쓸던 68년을 전후해서 결혼제도의 타파와 성 해방을 부르짖고 남녀혼숙기숙사를 만들고 낙태선언을 하던 바로 그 ‘운동권 여학생’들이 이제 30-40대의 사회인이 되어 자신들의 선배인 신여성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러시아의 수학자 소피아 코발렙스카야의 전기가 독일에서 출판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그 평전의 한국판 <소피아 코발렙스카야 - 불꽃처럼 살다간 러시아 여성수학자(시와 진실 간)>가 최근 국내에 번역 출판되었는데, 소피아 코발렙스카야라는 인물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여성의 대학입학을 불허하던 러시아를 떠나 서유럽을 편력하면서 곳곳에서 ‘최초의 여자대학생’, ‘최초의 학술지 편집인’,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가 되었던 ‘투사’였지만, 국내에선 수학계라면 모를까 여성학계에서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러시아 대사를 지낸 이인호 선생에 따르면, “유럽과 러시아의 수학계와 지성계에서 학자로서, 문필가로서, 그리고 혁명적 격동기를 풍미한 사회운동의 선구자로서 그가 누려온 명성과 존경은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에 못지 않게 전설적인 것”이다.

러시아 탈출을 위해 위장 결혼

우리는 흔히 19세기를 ‘빅토리아시대’라는 이름 아래, 융성하는 산업과 풍요로운 부르주아 계급과 위선적이고 억압적인 성 문화의 시대로 기억하지만, 그 시대에 천재 여성으로, 그것도 학문과 문학, 혁명에 대한 열정이 들끓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이미 불행이었다. 모국 러시아에선 여성의 대학 입학이 금지돼 있었고, 유럽에서도 스위스 정도를 빼고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대학이 여성을 받아주지 않았다. 상처 받기 쉬운 내면을 가진 한 감성적인 천재 여성은 그 첩첩의 바리케이드 앞에서 기를 쓰고 도전해보기도 하고 심한 좌절을 겪기도 하고 마녀나 악녀 취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시대와의 부조화만이 그의 딜레마는 아니었다. 그의 한쪽 자아는 학문적 성취와 문학에의 열망으로 내달렸고, 다른 쪽 자아는 남편과의 파트너쉽과 아이에 대한 책임 때문에 절치부심했다. 분열에 시달리는 지식인 여성의 모습은 바로 지금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1850년생인 소피아는 러시아 귀족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짜르 근위대의 장교였다. “소피아는 유모를 통해 러시아어를 배울 수 있었다. 부모와 이야기할 때는 불어를 썼고, 영국인 가정교사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이모들과는 독일어를 쓰기도 했다.” 소피아와 언니 아뉴따는 전형적인 귀족집안의 숙녀로 교육받았지만,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분위기가 그들이 요조숙녀로 커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소피아는 폴란드 봉기 소식에 귀를 쫑긋 세웠고 지식인들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들어가기) 운동을 선망했으며 민중에게 가장 잘 봉사하기 위해 의사가 되는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1860년 학생봉기 이후 대학이 여학생의 입학을 금지시키자 뜻하지 않게 소피아 자매의 유럽편력이 시작됐다. 여성은 남편이나 부친을 동반해야 해외여행이 가능한 시대라 이들은 러시아 탈출을 위해 위장결혼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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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른바 운동권의 위장결혼도 여러 종류였는데, 반체제 활동으로 투옥된 청년들의 형량을 줄이고 시베리아 유형길에 동행하기 위해 동료 여학생들이 위장결혼을 해주는 경우도 많았고, 진보적인 여성들의 유학길을 열어주기 위해 기꺼이 위장결혼을 해주는 청년들도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1917년 혁명을 주도한 볼세비키의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뻘 되는 이 시대의 공산주의자들을 당시 사람들이 ‘허무주의자’라 불렀다는 점이다. 짜르 시대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공산주의를 건설하겠다는 이들의 태도가 허무주의로 비쳤다는 게 아이러니컬하다.

여자는 수학자가 될 수 없다는 통념과 싸우다

러시아 여성들에게 당시 서유럽은 이상향이었지만 유럽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 자신들이 오히려 개척자 역할을 해야 했다. 유럽 대학에서 최초의 박사학위를 획득한 여성들은 거의 다 러시아 여성들이었다. 왜냐하면 유럽 어떤 나라도 러시아만큼 진보운동이 활발한 곳은 없었고 따라서 러시아 여성들의 의식도 그만큼 앞서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아홉에 유부녀가 된 소피아는,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청강생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베를린 대학에서 평생의 스승을 만났으며, 괴팅겐 대학에서 여자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 모든 과정은, ‘간혹 여자들이 정신적 능력에서 남자를 능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여자라도 정신과 통찰력을 친구들의 생활을 분석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뿐이지 순수하게 추상적인 영역에는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여자는 절대 수학자가 될 수 없다’는 통념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여성이 인류가 지향하는 최상의 것에 참여할 능력이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천재를 증명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그는 근대 유럽의 첫 여성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마흔 살에 스톡홀름 대학의 종신교수가 되었으며, <수학계 소식>이라는 학술잡지의 발행인이 되고, 수학계에서 유럽 최고의 권위인 프랑스의 보르당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학자인 동시에 작가이기도 했고 칼럼니스트이기도 했으며 때때로 혁명가가 되기도 했다. <행복을 위한 투쟁>이라는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렸고, 유년시절의 회상록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여성허무주의자>라는 소설도 썼다. 그런가 하면, 열혈 꼬뮤니스트가 된 언니와 함께 1871년 파리 꼬뮨의 현장에 머물면서 조직활동에 가담했다.

소피아의 전기에서 나를 끌어당긴 것 중 하나는 ‘유럽이라는 나라’의 매력이었다. 소피아는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폴란드 혁명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자랐고 독일의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파리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하고 스톡홀름에서 대학교수로 일했다. 그는 당대 유럽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내게 흥미로웠던 건, 그들 자매가 가령 도스또옙스키나 노벨에게 구혼을 받았다는 그런 단순한 사실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러시아나 영국, 프랑스, 스웨덴, 독일, 폴란드는 유럽이라는 나라의 여러 지방들 같았다. 파리나 런던, 베를린이 중심지라면, 스톡홀름이나 페떼르부르크는 변두리라는 차이 정도였다.

아, 남자들처럼 일에만 몰두할 수 있다면

소피아는 학문적 성취 쪽에서는 나름대로 빛을 보기도 했지만 개인사에서는 끊임없는 딜레마의 연속이었다. 위장결혼이 결국 사실혼으로 발전해서 딸 하나를 낳아서 키웠고, 끊임없이 사업에 실패하는 남편의 빚 감당을 해야 했다. 남편은 결국 마지막으로 손댄 석유사업이 파산한 뒤 자살한다.

소피아와 함께 연극작업을 하기도 했던 스웨덴의 여류 소설가 안나 샬롯테는 아내와 엄마로서의 의무 때문에 시간이 분산되어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임을 한탄하곤 했다. “아, 남자들처럼 자신의 온 생애를 하나의 지적인 작업에 바칠 수 있다면.”

그건 소피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모든 전선들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채 지쳐갈 때 그에게 늘 구원이 되었던 건 수학에의 열정이었고 문학에 대한 꿈이었다. 수학의 천재는 스무 살에 완성된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서 수학자들은 인생의 흥망성쇠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진행되는 걸까. 마흔한 살에 그는 일과 사람에 대한 열정과 탐닉으로 인해 ‘과로사’했다. 그는 몸살감기에 걸린 끝에 폐렴으로 죽었다. 지금의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에.

완전히 동떨어진 수학 세계가 있어 기뻐요

“시간이 날 때마다 수학 작업을 생각해요. 인생의 모든 것이 빛바래고 재미없어 보이는 순간에 수학이 더 유용하지요. 우리의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수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인문사회 계통의 전공을 한 사람으로서 나는, 가령 수학과 같은 순수과학이 그런 열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한편으론 이해되면서 한편으론 의아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인종들도 섹스를 할까, 하고 의심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오만이자 무지일 것이다. 각종 악재들이 난마처럼 얽혀들어 때때로 출구가 안 보이기도 하는 삶 한 켠에 그런 구원과 희망의 공간이 은닉돼 있다면, 그래도 그 인생은 살 만한 인생임에 틀림없다.

조선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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