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장수탕 선녀님』 백희나 글·그림
여유롭고 넉넉한 몸이
가진 아름다움 보여줘

ⓒ백희나, 『장수탕 선녀님』|책읽는곰
ⓒ백희나, 『장수탕 선녀님』|책읽는곰

 

예닐곱 살 된 여자아이 덕지가 엄마를 따라 동네 목욕탕에 가면서 시작되는 그림책 『장수탕 선녀님』. 큰 길가에 새로 생긴 스파랜드에는 불가마도 있고 얼음방도 있고 게임방도 있지만, 엄마는 덕지를 데리고 늘 장수탕에만 간다. 덕지가 장수탕에 가는 걸 그리 싫어하지 않은 이유는, 울지 않고 때를 밀면 엄마가 사주는 맛있는 요구르트가 있기 때문일 터. 뭐니 뭐니 해도 재밌게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냉탕도 장수탕에는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장수탕, 그것도 폭포수 벽화와 바위가 있는 냉탕에 이상한 할머니가 나타난다! 토끼 귀를 닮은 선녀 머리 모양에, 곱게 화장까지 한 할머니는 자신이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님이라고 덕지에게 말한다. 놀라 쳐다보는 덕지에게 겁먹지 말라며, 옛날이야기 선녀와 나무꾼도 들려주는데, 덕지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지만)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또 할머니와 즐겁게 물놀이도 한다, 그리고는 요구르트를 먹고 싶어 하는 선녀 할머니를 위해, 꾹 참고 때를 민다. 자신도 요구르트를 너무 먹고 싶지만, 기꺼이 포기한 채 말이다.

그림책 『장수탕 선녀님』에서 선녀는 우리 옆, 아주 가까이에서 산다. 오래전 전설이나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바로 동네 목욕탕에서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그림책 『장수탕 선녀님』은 일상 속에 숨어있는 판타지를 발견하고 있다. 장수탕에서 목욕탕에서 냉탕·온탕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것처럼 환상은 현실의 또 다른 그림자라고 은밀하게 속삭이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선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장수탕 선녀님은 훨씬 우리 옆에 가까이 있다. 게다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니!

현실에서 보면 자신만의 환상에 빠져 있는 ‘이상한 할머니’일 것이다. 그래서 장수탕 선녀님은 존재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 그 이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작가가 능청스럽고도 유쾌하게 보여주는 기분을 불러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백희나, 『장수탕 선녀님』|책읽는곰
ⓒ백희나, 『장수탕 선녀님』|책읽는곰

 

선녀와 나무꾼이 결혼하며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았지만, 선녀가 다시 날개 달린 옷을 찾아 하늘로 올라가면서 슬픈 반전으로 끝나지 않았나. 잠시 땅에 내려온 선녀가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 동안, 나뭇꾼이 선녀 옷을 몰래 훔쳐가는 바람에, 원하지도 않았던 결혼을 해야 했던 선녀의 아픔은 오롯이 소거된 채 말이다. 자유롭게 살던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채 땅에서 납작하게 살아야만 했던 선녀의 고통과 슬픔은 전혀 보여주지 않은 채 말이다.

그래서 작가가 점토인형을 사진으로 찍어 표현한 할머니의 둥글고 푼더분한 몸, 켜켜이 세월이 스며있는 듯한 주름살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날개를 빼앗긴 채 살아야 했던 선녀의 숨겨진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하다. 더군다나 여전히 옷을 찾지 못한 채, 장수탕의 맑은 샘물이라 할 수 있는 냉탕에 있는 선녀라니!

신기한 것은, 슬픔이 그 자체로 빛이 난다는 것! 울퉁불퉁 노쇠한 할머니의 맨 몸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아름답다. 덕지를 등에 업은 채 마치 비상하듯 물속을 가르는 할머니는 정말이지 선녀가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학자 수전 보르도는 여성들이 성형수술, 식이장애 등, 자신의 몸을 스스로 엄격하게 감시함으로써,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이야기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욕망의 대상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음으로써, 여성의 외모 관리는 그 보상을 받는다고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모관리는 여성들이 사회가 정한 미의 기준에 자신의 몸을 비교하는 결과를 낳았다. 몸이 정상화 기준의 척도가 되면서 스스로를 아름답지 못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몸을 추한 몸으로 평가하며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장수탕 선녀 할머니의 맨몸이 불편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자유로울 때 우리의 몸 속에 힘을 키워갈 수 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어쩌면 장수탕에 사는 선녀 할머니는 잃어버린 날개옷을 찾을 때까지 냉탕에서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모든 시간을 다 품은 채 자라고 늙어가는 몸을 사랑하는 방법을. 또 ‘정상화’로 이데올로기화 된 몸에서 이제는 자유로워지라고 덕지와 같은 어린 소녀들에게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다시는 날개옷을 빼앗기지 말라고!

집에 온 덕지는 콧물이 나고 온몸이 후끈후끈, 감기에 걸리지만 그날 밤 선녀 할머니가 물수건 대야에서 나타나 덕지의 이마를 어루만지자 다음날 아침 거짓말처럼 낫는다. 덕지의 상상인지도 모르지만, 덕지가 장수탕 할머니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자, 할머니가 진짜 선녀가 되어 덕지를 찾아가서 감기를 낫게 해준 것은 아닐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힘을 받고 새롭게 다시 살아나리라는 걸. 또 그 힘은 덕지의 이마를 어루만져준 장수탕 선녀 할머니의 손처럼 서로에게 전해진다는 걸. 잃어버린 무수한 선녀들의 옷을 다시 찾아줄 때까지.

 

윤정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공연을 만들어 올리는 작가다. 독서치료사로서 10년 넘게 그림책 치유워크숍 활동을 해오고 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보는 문화예술 비평 작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주요 저서로는 『조금 다르면 어때?』 『팝콘 먹는 페미니즘』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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