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유방암 치료를 위해 입퇴원을 몇 달간 거듭한 적이 있다. 동병상련이라고, 워낙 고생스러운 치료라 환우들끼리 서로 걱정하며 챙겨주게 되고, 그러다보면 고생 중에도 같이 웃을 일이 생긴다. 병원 친구들은 주부, 회사원, 용접공, 구두 판매원, 피아노 선생 등 직업과 학력이 다양했다. 여성으로 인생을 산 얘기를 들어보면 모두 역전의 용사였다. 이 사람들과 친해져서 나는 아픈 중에도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유방암 병동에는 따사로운 자매애가 피어났다. 남자만 걸리는 병이 있어 그들끼리 병동에서 같이 지낸다면, 거기도 이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생겨날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처음 입원하여 수술을 앞둔 날, 앞으로 겪을 일이 두려웠다. 누군가 경험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유방암 환자는 다들 모자를 쓰고 다니니 그 중에 고르면 되었다. 자그마하고 통통한 체격에 하얀 얼굴, 동그란 눈을 가진 사람이 음식을 들고 왔다갔다 하며 사람들과 웃고 얘기하는 것이 보였다. 친절해 보이기에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내가 사람을 얼마나 잘 찍었는지! 옥희씨의 따듯한 공감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고, 마음이 풀리면서 눈물이 났다. 나보다 일곱 살 아래였던 그는 나이를 확인하자마자 내게 언니라고 불렀다. 하지만 막상 언니 노릇은 늘 그가 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의 곁에는 언제나 사람이 모여들었다. 아주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힘든 날만 아니면 이사람 저사람 챙기고 다니며 유머를 발사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내가 “응, 회진 왔어?” 할 정도였다.

옥희씨에게 신세진 것은 한도 없다. 내가 심히 아픈 어느 날, 그 사정을 보고 간 그가 조금 후에 큰 피자 한 판을 사들고 환우 대여섯 명과 함께 들이 닥쳤다. “언니, 이 피자 한 쪽 먹어봐. 오래간만이니 입맛 날거야. 같이 먹자.” 죽도 못 먹겠는데 기름진 피자라니. 나는 고맙지만 도저히 못 먹겠다고 했다. “아니야 언니, 먹을 수 있어. 내가 겪어봐서 알잖아. 무조건 잘 먹어야 돼. 우선 한 입만!” 하며 그는 피자를 내 입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까지 해주는 데는 거절할 수가 없어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억지로 한입을 먹었다. 그 성화에 결국 피자 한 쪽을 다 먹었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우울도 날아가서, 아픈 건 아픈 거고 한참을 같이 웃고 놀았다.

옥희씨의 넉넉한 인품과 따듯한 활기에 나는 반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여자가, 이렇게 성숙한 인간이 있구나 하고 경탄했다. 나도 그때까지 오십 몇 년을 살면서 괜찮은 사람이 되어보려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너무 모자라구나 하고 반성이 절로 되었다. 그는 작은 공장에서 일했다. 사무도 보고, 용접도 하고 사통팔달로 활약하는 직원인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힘든 일을 골라서 하냐고 물었더니, 이혼하고 아이 둘 키우려니 이일 저일 가릴 수가 없었단다. 하다 보니 할만 해지더란다. 존경스러웠다. 

우리는 친구가 되어 치료가 다 끝나고도 계속 만났다. 그러다가 한동안 연락이 뜸해서 전화를 했더니 망설이는 목소리로 입원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닌가. 암이 골수로 전이되었다는 말에 내 가슴은 쿵 내려앉았다. 문병을 갔고 얼마 후 그는 하늘로 떠났다. 왜 옥희씨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 병은 정말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나보다 젊고 활기차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무엇보다 흉내 낼 수 없는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인 그는 병을 잘 이겨내고 오래 살줄만 알았다.

일 년 남짓 밖에 사귀지 못한 친구지만 그를 잃은 상실감은 컸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나는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인생을 누가 알랴, 오래 사는 것만이 행복이겠냐, 옥희씨는 사는 동안 인생을 풍부하게 살았고 누구보다도 사랑을 많이 나누었다, 이 멋진 여성을 만나 잠시 친구로 지낸 것도 행운이지, 울고 앉아있는 건 어리석다..... 하늘에서 그가 살살 눈웃음치며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언니, 좀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만, 하하. 근데 여기 좋아. 아직 모르지? 기다리고 있으니 때 되면 와요.”

시인 테니슨은 말했다. “사랑하고 잃어버린 것이 한 번도 사랑해보지 못한 것보다 낫다.” 옥희씨가 떠났을 당시에는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려웠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런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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