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때려 죽여도 남편은 ‘집행유예’?
아내 때려 죽여도 남편은 ‘집행유예’?
  • 이하나 기자
  • 승인 2019.07.04 06:10
  • 수정 2019-07-03 22: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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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폭행 살해한 남편은
“우발적 범행”이라며 감경
37년 상습폭력 남편 죽이자
“살해 의도 있었다” 징역형
매질에 참다못해 남편 죽여도
정당방위 인정 판례는 ‘0건’
대법원 내부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은 한 손에는 법전을, 나머지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이 여신상은 모든 이들이 법 앞에 평등함을 상징하고 있지만, 남성중심적 법체계는 여성들에게 공평하지만은 않다. 가정폭력 피해자에 의한 가해자 사망 사건에서 사법부가 피해 여성의 관점에서 정당방위를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대법원 내부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은 한 손에는 법전을, 나머지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이 여신상은 모든 이들이 법 앞에 평등함을 상징하고 있지만, 남성중심적 법체계는 여성들에게 공평하지만은 않다. 가정폭력 피해자에 의한 가해자 사망 사건에서 사법부가 피해 여성의 관점에서 정당방위를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배우자를 죽인 두 명의 살인자에게 전혀 다른 판결이 내려졌다. 말다툼 도중 아내의 머리를 수차례 때려 숨지게 한 50대 남성에게 재판부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범행을 인정하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그 이유다. 또 다른 살인자는 37년 간 남편에게 학대 받다 남편을 죽인 아내다. 재판부는 이 여성에게 징역 8년형을 선고했다. 배우자를 살해했으나 두 사람에게 다른 판결이 내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광주지법 제11형사부(부장판사 송각엽)는 지난달 23일 폭행치사 혐의로 기소된 남성 A(58)씨에 대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해 8월 20일 광주의 한 식당에서 주먹으로 아내 B(54)씨의 머리 부위를 수차례 폭행해 아내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재판에 넘겨진 A씨는 아내와 말다툼 중 아내가 자신의 셔츠를 찢고 손목을 물자 화가 나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B씨는 평소 뇌 질환으로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고 약물치료를 받아왔다.

재판부는 “A씨가 범행을 인정하고 있는 점, 말다툼 중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점, A씨의 범행뿐만 아니라 B씨의 기왕증도 사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점, A씨가 평소 폭력적 성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면서 집행유예 선고 배경을 밝혔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판결문에는 ‘우발적 범행’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싸우다가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반면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남편을 살해한 사건에서 재판부는 아내의 ‘살해 의도’를 읽는다.

지난해 7월 대법원 1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남편을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김모(61)씨에게 징역 4년을 확정했다. 37년 결혼생활 내내 폭력에 시달렸던 김씨는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씨는 “칼에 찔리고 가스통으로 머리를 가격당해 혼절해서 응급실에 실려 갔던 적도 있는” 등 지속적인 가정폭력으로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사건 당일에도 아내가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로 남편이 폭력을 휘둘렀고 그가 잠들자 돌로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다. 그러나 지속적이거나 위협적인 가정폭력 상황을 피하기 위해 발생하는 정당방위 행위를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가정폭력 피해자인 김씨는 남편을 살해한 범죄자로 살아가야 한다.

가정폭력 살해 사건에도 패턴이 보인다. 가정폭력 가해자인 남편은 폭력을 휘두르다 아내를 살해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수십 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는 남편이 잠들거나 무방비 상태일 때 공격한다. 재판부가 아내 살해를 “우발적 범행”으로, 남편 살해를 “살해 의도가 있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서 나온다. 가정폭력 피해자의 특수성은 외면한 채 정당방위의 인정요건인 ‘침해의 현재성’과 ‘방위행위의 상당성’을 부인한다. 즉, 남편의 폭력 행위가 사건 당시 벌이지지 않았고 가해자가 때린 만큼만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게 재판부의 인식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가정폭력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수십 년간 남편의 학대 밑에 살아온 아내는 남편이 잠든 상황에도 언제라도 가해자가 일어나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놓이게 된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경우에는 여성이 ‘순간적으로 격분해 우발적으로’라는 문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2014년 발표된 여성학자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의 논문 ‘살인과 젠더’를 보면, 아내를 살해한 121건의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가 살인 동기를 주로 ‘격분’(56.1%)과 ‘분노’(16.7%)로 해석한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재판문에는 “순간 격분하여”, “우발적으로”, “술에 취하여”, “화가 나” 등의 문구가 자주 등장하며, 이는 감경사유가 된다. 반면, 남편 살해 사건 21건의 판결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피해 여성들은 평균 20년간 남편에게 폭력과 학대를 당했지만 남성의 폭력이나 외도는 여성들의 격노와 살인의 동기로 해석되지 않고, 당연히 감경사유로도 고려되지 않았다.

남편의 가정폭력에 오랫동안 시달리던 여성이 매 맞는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경우 재판부가 ‘정당방위’를 인정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모두 ‘살인죄’로 처벌해왔다. 한국여성의전화가 1991년부터 2012년까지 매 맞는 아내의 남편 살해 사건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각급 법원은 해당 여성들에게 △상당한 폭행을 당하는 시점에서 한 행동이 아니고 △부당한 공격을 막기 위한 행위가 방위 수준을 넘었다는 등의 이유로 모두 살인죄를 확정해 평균 징역 4년 2개월을 선고했다.

허민숙 조사관은 “사법부를 비롯해 법을 만드는 국회와, 집행하는 행정부도 남성 중심적 인식부터 달라져야 한다”며 “가정폭력을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로 바라보고 가정폭력 피해자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성인지 관점으로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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