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 김서현 기자
  • 승인 2019.07.07 10:54
  • 수정 2019-07-07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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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 작가 『항구의 사랑』(민음사)
팬픽·여학교 내 동성애 소재
목포와 서울로 대비되는
비정상성과 정상성에 질문

 

김세희 작가 ⓒ민음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서 갑작스럽게 만난 인희는 고등학교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옆머리가 긴 짧은 머리와 커다란 워커, 흘러내리는 힙합바지를 입은 인희는 거리에서 눈에 띄었다. ‘나’는 그런 인희와 같이 있는 모습을 대학 동기들의 눈에 띌까 두려워 식은땀을 흘린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인희의 말에 ‘나’는 시선을 피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땐 다 미쳤었어.”

김세희(32) 작가의 경장편소설 『항구의 사랑』(민음사)은 2000년대 초 항구 도시 목포에서 여고를 다니며 아이돌 팬픽 문화와 ‘팬픽 이반’을 보고 겪은 ‘나’의 이야기다. 아이돌 팬덤 문화 중 하나였던 팬픽션(Fan Fiction)은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다양한 내용의 서사를 그린다. 주된 내용은 아이돌 그룹의 동성 멤버 둘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다. 팬픽 이반은 2000년대 초반 여학교를 중심으로 동성애를 하던 학생들을 문화·사회적으로 칭하는 말이다.

 

주인공 준희는 여고 시절 ‘민선 선배’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서울로 대학을 오며 욕망을 묻어둔다. 어른이 된 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다시 마주하며 성장한다.

고등학생 준희를 둘러싼 환경은 동성애가 낯설지 않다. 그가 다닌 여고에서 아이들은 “모두들 끌어안고 있었고 서로의 품에 기대어 5분 또는 10분간 짧은 잠을 자”고, “셀러브리티 커플”도 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팬픽 소설을 돌려 본다. 교사들은 이런 아이들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하지만 ‘누워있는 행위’와 ‘팬픽 읽는 행위’만을 금지한다. 그들은 “어디까지가 동성애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 가려낼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며 서울로 올라온 준희의 세계는 급작스럽게 변한다.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해 남자 선배들의 시선을 받는 순간 크게 금이 가는 소리를 듣는다.” 준희는 더 이상 팬픽을 읽지 않으며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 익숙해지며 대화의 대부분을 남자 이야기로 채우는 친구들과의 교류에 익숙해진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의 모습으로 찾아와 여자와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인희는 부담스럽고 불편한 존재다.

책에 실린 ‘작가의 말’에는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라는 구절이 있다. “책을 쓰며 또래 여성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다 말하면 다들 공감했어요. 나는 이런 팬픽을 좋아했다, 우리 학교에는 이런 커플이 있었다며 수다가 끝없이 이어졌지요. 비슷한 10대 시절을 보낸 여성들에게 그 시절을 회상할 계기가 되길 바라며, 말을 거는 심정으로 썼어요.” 김 작가는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김 작가는 “이전과 달리 자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계에서 준희는 새로운 세계가 원하는 ‘여자 대학생’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하지만 인희는 그러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목포는 물리적으로 남쪽 끝에 있고 또 굉장히 작은 도시예요. 그에 비해 서울은 이른바 거대한 주류 세계이고 ‘정상성’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수많은 ‘준희들’과 ‘인희들’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2015년 등단한 김 작가는 소설집 『가만한 나날』로 2018년 제9회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다. 청춘들의 오늘 이 시각 가진 생각과 고민을 솔직하고 담담한 문체로 나열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이번 소설에서 음지 문화로 여겨져 모두 어린 날의 기억으로 묻어두고 기억 하지 않던 팬픽, 여학교의 동성애 ‘팬픽 이반’을 모조리 소환한다. 소설 속에서 소녀 준희는 교사들이 그토록 막으려 애쓰고 주류사회가 입막음 하던 팬픽과 동성애를 통해 감춰야 했던 성적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깨닫는다. 김 작가는 미성숙한 감정으로 치부되기 십상인 소녀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담백하게 보여주며 ‘여자 아이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도 함께 그려낸다.

“우리 사회는 10대 시절 동성에게 품는 어떤 감정을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철없던 시절 있었던 일이야, 미성숙한 시절의 착각일 뿐이었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준희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건 사랑이었어’ 라고 말할 수 있게 돼요. 저는 『항구의 사랑』이 성장소설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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