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7시 30분 신촌 창천교회에서 고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장례예배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장상 전 총리서리는 추도사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반려자이자 평생 동지로서의 삶의 길을 선택한 이희호 여사의 삶을 회고했습니다. 추도사 전문을 소개합니다.  

장상 이희호 여사 장례위원회 위원장이 11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에 들어서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장상 장례위원회 위원장이 11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에 들어서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97년의 삶을 한결같이 이끌어주신 생명의 주님께, 하나님의 딸 이희호여사가 하늘로 향하는 환송예배를 드리는 순간입니다. 우리들 마음에는 슬픔과 애통하는 바가 크지만,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종의 환송예배를 하늘에서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여사님은 행복한 가정에 태어나서 역사의 풍랑 가운데서도, 국내외적으로 훌륭한 교육으로 지도자의 역량을 준비하는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축복을 이 땅의 어려운 현실 앞에 아낌없이 헌신하는 삶의 길을 택합니다. 그것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결혼입

니다. 많은 친지와 선배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존경하며, 사랑하며, 그의 큰 꿈을 돕고 싶다”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큰 인물을 알아보는 혜안, 큰 일을 꿈꾸는 높은 뜻을 이해하는 선견지명, 그 뜻을 위해 함께 하고자 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인해 김대중의 반려자, 동행자, 동지로 함께 하는 삶의 길을 택하십니다.

그러나 그 삶은 끊임없이 고민하며, 투쟁하며, 역경을 넘고 넘는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반려자로서, 동지로서의 여사님의 삶은 한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서, 한 시대의 민족과 나라와 함께 하는 차원의 삶으로 지평이 넓어집니다. 여사님은 큰 꿈을 위해 고난의 길을 헤쳐갈 수 있는 끊임없는 사랑의 동력이 되며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계속합니다. 유신 독재 시절 옥고와 납치 등으로 시련에 시련이 이어지던 때에도 여사님은 묵묵히 남편의 곁을 지키며, 흔들리지 않을 것을 당부하는 동반자, 동지였습니다.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내가 그를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곧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은, 아니 우리의 사랑은 곧 조국이었습니다.” 라고 여사는 고백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써 말할 수 없이 험난한 세월들을 살아야 했으나 흔들림없이 남편은 물론이고, 가족들,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을 돌보며, 함께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까지 김대중 대통령 스스로 고백합니다.

옥중서신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라고 쓰고 있습니다.

댁에 “김대중,” “이희호”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었듯이, 두 분은 나란히 동행자로써 동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두 분의 아름답고 차원 높은 부부관계를 잘 드러냅니다. 그는 영부인이라고 불리기 보다는 “여사”라는 호칭을 선호하셨습니다. 사실 여사님은 결혼 전 이미 여성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일찍이 대한여자청년단 결성에 이어서, 여성문제연구회 창립을 주도하셨고, 대한 YWCA 연합회 총무로서 기독여성운동을 이끄셨고,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축첩정치인 반대운동, 호주제 폐지 등 가족법 개정운동, 그리고 여성가족부 운동을 이끄셨습니다.

남녀가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인정받는 사회를 위해, 여성 인권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셨습니다. 그 분의 그런 소망이 마침내 정부에 양성평등법, 여성부를 신설하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영부인이 되신 후에도 여성권익 증진을 위해서 격려를 끊이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의 울림이 컸던 것도 여사님의 흔들림없는 양심의 소리와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불굴의 의지가 더해졌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운동가로서 여사님의 방식은 “사랑의 친구들” 단체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랑의 친구”로, “사랑의 친구들”을 돌보며, “사랑의 친구들”의 범위를 조용히 넓혀가는 진정성있는 운동 방식이었습니다.

여사님은 지성과 사랑, 역사의식과 비전을 지닌 이 시대의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이시며, 인권운동, 민주주의를 위한 역군으로서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신 분이십니다. 더욱이 이 땅의 평화, 통일을 위해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고령이셨지만 김대통령의 유지를 이어가는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어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여사님의 간곡한 뜻으로 남북의 길이 다시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여사님께서는 그 긴 세월, 그 어려운 길을 어떻게 흔들림없이 실족하지 않고 걸어오실 수 있었을까? 모두의 의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셨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 그 분의 유일무이한 재산이었고, 기도가 그 분의 유일무이한 무기였습니다.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여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매달려 밤새도록 철야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사님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는 신앙고백을 즐겨 읊으셨습니다.

“난 어려운 시절에도 그렇게 크게 걱정하거나 낙심하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그저 기다리고 있으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지요.” 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여사님은 고난의 시절이나 영광의 시절이나 한결같이 평온하고 겸손하셨습니다.

시인의 노래는 여사님의 신앙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하며 찬양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내 평생에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노래하듯이,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때로는 푸른 풀밭으로, 때로는 잔잔한 시냇가로, 때로는 험난한 굴곡으로 이끌리었던 여사님의 삶이 마침내 영원히 거하실 여호와의 길에 이르렀습니다.

여사님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과 놀라운 은총과 축복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사랑과 화합”을 위한 여사님의 마지막 기도를 받으시기 소망합니다.

2019년 6월 14일

장상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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