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중에 가장 기대가 가는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의 추억이라니? 살인자가 알싸한 과거를 회상하는 느낌이 드는 이 제목의 영화는 익히 알려졌다시피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했고 감독이 봉준호다. 배두나를 사정없이 망가뜨린 <플란더스의 개>를 감독했던 장본인. 이번엔 송강호와 김상경이다. 영화는 <넘버3> 플러스 <반칙왕> 플러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플러스 <생활의 발견> 쯤? 화면발 죽이고, 재미 죽이고, 사람도 많이 죽인다.

재미와 예술을 한 손에 잡은 박수왕 <살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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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히게 잘 만들었다. 이미 영화평론가, 영화담당기자 모두들 한 통속이 돼서 입안에 붙은 침일랑 다 쏟아부으며 지면이 모자라다 칭찬을 퍼부어댔는데, 그렇다고 쫄 것 없다. 보통 영화평론가들이 침 튀기기 좋아하던 예술도 좋지만 재미는 글쎄인 ‘저주받은 걸작’류는 아니다. 재미도 있고, 웃기기도 하고, 뭔가 찡하고, 심지어 가슴이 묵직하다. 송강호와 김상경의 연기는 거의 경지 수준에 이르고, 반은 신나게 웃다가 반은 쿵쿵 심장이 뛰다가 막판엔 뿌듯하다. 돈 아깝지 않고, 잘 골랐단 생각에.

줄거리? 간단히 말해서, 1980년대 한 시골에 여성들이 줄줄이 똑같은 수법으로 강간당한 뒤 살해당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형사들이 동분서주하더라. 이런 이야기쯤 된다. 무조건 발길질에 두들겨 패서 막무가내 자백을 받는 게 주특기인 형사 박두만(송강호)이 있는 경찰서에, 모든 진실은 ‘서류’에 있다고 믿는 형사 서태윤(김상경)이 서울에서 자원해 내려온다.

시골길을 뚜벅뚜벅 걷다가 앞에서 엎어진 여자 때문에 괜히 그를 강간범으로 오인한 박두만은 서태윤에게 온몸을 날려 이단 옆차기로 내려친다. “야 임마. 여기가 강간의 제국인 줄 아냐?” 그리하여 둘은 치고 받으며 연쇄살인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도대체 어떤 놈이 범인이냐? 잠깐. 박해일이 살인 용의자로 잠깐 얼굴 비추는데,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감독들이 왜들 그리 그한테 침을 흘리며 열심히 콜을 해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감독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입가에 주르륵 흘러버린 침을 닦다보면! (4월 25일 개봉)

그래서? : 우리 영화도 (간혹) 제대로 만드는구나. 훌륭하면서 재미까지?

그런데? : 빛나는 남성 캐릭터의 향연. 샘 난다. 매번 그저 남자하고 섬씽으로 일관하는, 발정기 고양이 같은 여성 캐릭터 일색인 한국영화를 생각할수록 점점 더.

이것이 SF 롤러코스터다 <엑스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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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 기대주로는 단연 <엑스맨2 X-Men 2>다. 전작 만한 속편 없다는 속설을 깨고, 전편을 만들었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전작을 능가하는 재미와 스피드를 갖고 돌아왔다. 태어나면서부터 원래 돌연변이였던 다른 치들과 달리, 뭔가 알쏭달쏭 수수께끼 인물 같던 돌연변이 울버린의 정체가 2편 들어 드러난다. 뭐냐구? 말해주고 싶은 마음 굴뚝이요, 겨드랑이부터 발가락까지 백 마리 빈대가 들러붙은 양 근질근질하지만, 말할 수 없다. 말하면, 욕먹는다. 뭐 그렇다고 특별한 반전은 아닌데다 전편에서 은근히 대충 알려준 바 있으니, 그냥 보면 안다.

이번 엑스맨은 전작보다 세 배쯤은 파워업 된 롤러코스터다. 전작이 돌연변이들의 아웃사이더적 태생적 딜레마에 묘한 철학적 분위기를 지녔다면, 2편은 그럴 새도 없이 눈 팽팽 돌아가다 보면 디 엔드다. 1편에서는 안나 파킨이 연기한 로그가 히든카드처럼 주요한 역할을 했다면, 이번엔 울버린이 확실한 주인공이다. 거기다 누구로도 변신이 가능한 미스틱이 큰 역할을 하면서, 텔레포트가 주특기인 신참 돌연변이 나이트 크롤러(알란 커밍)를 비롯해 뭐든지 얼려버리는 아이스맨, 불씨만 보면 확 불질러버리는 파이로 등등 온갖 초능력의 버라이어티쇼다.

전편이 돌연변이계의 악당 매그니토와의 싸움이었다면, 이번엔 인간으로 돌연변이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올라 돌연변이 박멸에 평생을 바친 스트라이커(윌리엄 콕스)와 한판승이다.(돌연변이가 바퀴벌레냐?) 1편이 인간을 몰살시키려는 돌연변이 매그니토로부터 인간을 지키려했다면, 2편은 돌연변이를 완전히 몰살시키려는 인간으로부터 돌연변이를 구하기 작전이다. 한 마디로 더 커졌고, 더 세졌고, 팽창된 눈동자가 줄어들 틈이 없다. (4월 30일 개봉)

그래서?: 죽인다. 정신 못 차리겠다. 부럽다. 나에게도 초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으헉? 하고 보니 끝났다. 생각할 게 없다.

유오성, 멜로의 <별>로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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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오성 팬들 가슴을 살랑살랑 흔들던 <별> 볼 일이 생겼다. 내건 대표 카피도 ‘유오성, 그 남자의 휴먼 멜로’다. 맨날 누군가를 두들겨 패거나 칼로 쑤시거나 그런 역할만 해온 유오성이 이번엔 아무도 안 때리고, 어벙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로 나온다. 그것만도 신선한 건지 신기한 건지 아무튼 그렇다. 발길질은커녕 주먹질 장면 하나 없고, 고즈넉한 자연 풍광이 주를 이루면서 촉촉하게 안타깝게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다.

물론 중간에 끼어든 공형진의 감초 연기에 잠깐 코미디영화로 착각할 뻔하긴 했다. 어릴 적 부모를 시장터에서 잃어버리고 생 고아가 된 영우(유오성)는 개 알퐁스를 데리고 사는 고독한 샐러리맨, 전화국 엔지니어다. 그런데 짝사랑하는 그녀가 있었으니, 수의사 수연(박진희)이다. 그런데 수줍은 성격에 어렵게 어렵게 데이트 신청을 하지만, 하필이면 비까지 내리는 날 처절하게 바람맞고 빗속을 헤매다 억울한 일까지 당하자, 아무도 안 가려드는 외지 근무를 자청하는데? (5월 1일 개봉)

그래서?: 촉촉하다. 카리스마의 대명사 유오성이 눈썹에 힘 주지 않을 때 얼굴을 볼 수 있다. 박진희, 다리가 저렇게 예뻤던가?

그런데?: 까닥하다간 ‘휴면’ 멜로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카페인이 필요하다. 클라이막스가 약간 웃긴다. 뭔지는 말할 수 없다. 말하면 김 샌다.

기막힌 이야기냐? 로맨틱 코미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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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화제작 <어댑테이션 Adaptation>이다. 전작 <존 말코비치 되기>로 기막힌 상상력을 지닌 확실한 이야기꾼임을 만천하에 증명하며 천재 시나리오작가 소리까지 들었던 찰리 카우프만의 신작이다. 포스터도 기발하지만, 영화 역시 이번에도 뒤통수 치는 건 여전하다. ‘쌍둥이 천재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사건, 두 개의 상상, 세 가지 결말’이란 묘한 광고 카피처럼 영화는 묘하다. 아카데미 각본상을 타면서 천재 작가로 떠오른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은 차기작 <난초도둑>을 각색하면서 머리에 쥐가 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무것도 아니던 쌍둥이 동생 도널드가 찰리를 보고 갑자기 시나리오작가가 되겠다고 설치더니, 설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단번에 흥행작가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머리를 쥐어짜던 찰리는 급기야 동생더러 도움을 청하는데 <난초도둑>의 작가 수잔 올리언(메릴 스트립)과 찰리 사이에 뭔가 비밀이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머리만 벗겨지는 줄 알았더니 연기력의 경지도 벗겨지는 게 느껴진다. (5월 8일 개봉)

핑크빛 상큼하고 쿨한 러브스토리가 역시 내 취향이라면, 골디 혼의 딸이란 타이틀이 절대 벗겨질 것 같지 않은 ‘골디 혼 판박이’ 케이트 허드슨이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이란 기사를 쓰기 위해, 멋진 남자 벤자민(매튜 매커너히)를 일단 꼬신 뒤에 그가 질려 나가떨어질 행동들만 골라 해대는 엽기녀로 나오는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 How to lose a guy in 10 days>이 제격이다. 로맨틱계의 떠오르는 샛별 케이트의 매력은 그만하면 꽤 상큼하다. (5월 8일 개봉)

아니, 아니, 사랑은 역시 끈적끈적해야 제맛이지, 라고 생각한다면? <살인의 추억>과 같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인 <나비>가 있다. 서울에 갔다가 폼나게 돌아오겠다고 떠난 내 사랑 민재(김민종)는 돌아오지 않고, 그를 기다리던 혜미(김정은)는 군 고위간부 허대령(독고영재)의 여자가 돼버린 후에야 제비가 된 민재와 만난다. 그러나 아직도 사랑은 식지 않았고 그를 눈치챈 허대령은 민재를 삼청교육대로 보내버린다. 그랬더니 거기엔 또 황대위가 떡 하니 혜미를 기다리는데? 줄거리만으로도 대충 무슨 이야기일지 감을 받았을 듯해 더 말하지 않겠다. 다만 무진장 때리는데, 가끔씩 자기 무릎을 때려보고 싶을 때가 있단 생각이 들지도 모른단 말 밖에.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고. (4월 30일 개봉)

그런데 어째 다 어른용이냐? 아이들과 볼 건 없단 말이냐? 있다. 한국형 가족 애니메이션을 표방한 <오세암>이다. 정채봉 원작의 이 애니메이션은 감동과 눈물을 작정한 듯하니 가기 전 미리 손수건이나 휴지를 챙겨가길. 설악산 골짜기에 있는 작은 암자에 전해 내려오던 설화라는데, 다섯 살 꼬마가 엄마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한국판 엄마 찾아 삼만리? (5월 1일 개봉)

이중에서도 볼 만한 영화가 없다면? 그냥 집에서 잠자는 방바닥의 굼벵이나 찍어라. TV 리모콘을 꽉 쥔 채로. 손에 밴 땀을 간간이 닦아줄 손수건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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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미 기자cool@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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