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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향미>

“엄마, 나 살기 싫어. 이렇게 하고 어떻게 살어?”

이건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조카 윤석이가 하루 종일 놀지도 못하게 공부만 시키는 무서운 아빠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엄마한테 와서 조그맣게 속삭였다는 내용이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평균수명은 자꾸 늘어나서 윤석이가 노인이 될 쯤엔 도대체 몇 살까지 살지 예측하기조차 힘든 초고령 사회가 될 것이고, 윤석이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놀며 지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창 놀아야 할 나이에 놀지도 못하고 벌써부터 앞으로 살 일이 걱정이라면, 뭐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닐까?

지금의 아이들에 비하면 훨씬 잘 놀았던 지금의 장년층이나 노년층도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하소연이 대단한데, 어려서도 놀아보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은 노년이 되면 어떻게 될까? 평생 즐길 만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할 대학생활에서도 취업 준비에만 몰두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혹시 이 아이들이 퇴직할 때쯤이 되면 ‘노는 과외’가 유행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삶은 연속적이다. 잘 노는 아이들이 제대로 잘 노는 어른이 되고, 또 제대로 잘 노는 중년은 그러한 노년으로 이어질 것이다. 죽어라고 일만 하다가 퇴직하면 갑자기 잘 논다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바쁠 때야 무료함이 그립겠지만, 무료함을 견딘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58살의 ㅇ씨는 작년에 30년 동안 다니던 은행에서 퇴직했다. 좀 더 승진할 수도 있는데 퇴직한 것이 못내 서운하긴 했지만 다른 퇴직자들에 비하면 ㅇ씨의 객관적인 조건은 매우 좋은 편이다. 경제적으로도 걱정이 없고 자녀들도 다 독립시켰다. 이제 재미있게 놀 일만 남았다. 한데 바로 이 ‘노는 일’이 문제였다.

“일생동안 앞만 보며 일만 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놀라니… 아무리 놀래도 놀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세대지요.”

ㅇ씨처럼 돈과 시간은 충분한데도 놀 수가 없다는 퇴직자들이나 노인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여자보다 남자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놀고 싶어도 놀 수 없는 젊은 사람들이 듣기에는 괜한 엄살 같겠지만, 이들로서는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어요. 아침에 창 밖으로 동이 터 오는 모습을 보면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그냥 이대로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지요.”

나는 ㅇ씨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놀이가 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에는 일하는 것보다 일하지 않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던 시대도 많았고, 플라톤 같은 이는 일손을 놓고 한가로운 상태에서야 사물의 본질을 관조하는 철학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노예에게는 놀이시간을 주지 않는 법이다. 놀이란 필연적으로 자유와 창조에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노년이 되면 놀이가 일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다. 아니, 어쩌면 유년과 노년은 ‘노는 게 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는 시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놀이보다는 일이 더 중요시되는 노동윤리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어려서는 일을 하기 위한 교육에, 어른이 되어서는 일에 파묻혀서 놀이를 잃고, 노는 방법마저 잊어버렸다. 놀이란 일을 위해서만 있는 것처럼 인식되고, 앞만 보고 사는 삶에서 놀이란 초조한 것이고 재미는 두려운 것으로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일은 유한하다. 즉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 한다. 비록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일을 놓아야 하는 시기가 온다. 또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대신 놀이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중요해진다. 한창 일할 때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 정체성에 문제를 일으키듯이, 놀아야 할 때 제대로 놀지 못하는 사람은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 끊임없이 남의 말을 하거나 쓸 데 없는 정보를 퍼뜨리면서 정신만 빼놓기 일쑤이다. 혹은 가족이나 자녀에게 지나친 애정을 쏟거나 간섭함으로써 질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제부터라도 매주 얼마만큼의 시간을 정말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비생산적인 놀이에 할애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놀이의 수단과 방법일 텐데, 이것이 한 사람의 교양과 품성을 보여주는 표식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을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 놀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니까. 나의 자아가 마음껏 뛰어 놀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건 너무 고상해. 재미없어”하고 소리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놀려고 해도 놀 수가 없다는 ㅇ씨를 위해 다음의 시를 들려주고 싶다.

내가 늙었을 때 난 들판으로 나가야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닐 거야/ 물가의 강아지풀도 건드려 보고/ 납작한 돌로 물수제비도 떠 봐야지/ 소금쟁이들을 놀래키면서// 해질 무렵에는 서쪽으로 갈 거야/ 노을이 내 딱딱해진 가슴을/ 수천 개의 반짝이는 조각들로 만드는 걸 느끼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제비꽃들과 함께 웃기도 할거야/ 그리고 귀 기울여 듣는 산들에게/ 내 노래를 들려줄 거야// 하지만 지금부터 조금씩 연습해야 할 지도 몰라/ 나를 아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내가 늙어서 넥타이를 벗어 던졌을 때 말야

(드류 레더의 ‘내가 늙었을 때’ 중에서)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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