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문제연구회 창립 주도,
YWCA 등 여성운동 하며
여성 권익 향상에 헌신
‘혼인 신고 합시다’ 캠페인 등
가족법 개정 운동에 앞장

평생 동지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 문패’, 여성부 신설 등
아내 영향 받아 성평등 실천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맡아
남북 화해·협력 위해 온 힘

고 이희호 여사 영정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고 이희호 여사 영정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한 평생 여성 인권과 민주화에 헌신한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0일 오후 11시37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고인은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앞장선 여성운동가로, 정치인 김대중의 평생 동지이자 민주화운동가로 살았다.

고인은 1922년 9월 부친 이용기씨와 어머니 이순이씨의 6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부친은 전북 남원 도립병원장과 경기 포천 도립병원장을 지냈지만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다. 어머니 이순이씨는 한의사집 가정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모태신앙인이 됐다.

이화고등여학교(이화여고 전신)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을 다닌 고인은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이화여전 졸업을 하지 못했다. 해방 후인 1946년 9월 다시 서울대학교 사범대 영문학과 입학했으나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적을 옮겼다. 1950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전쟁통에 부산을 피난했고 그곳에서 친구 김정례 등과 함께 대한여자청년단을 결성했다. 여성의 권익을 찾아주자는 취지의 여성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으나 군경원호 활동에 치중되자 그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1952년 11월 그는 여성 교육운동가 황신덕, 최초 여성 당수 박순천,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등 젊은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하고 여성의 인권과 법적 권리를 도모하는데 몰두했다. 그는 초대 회장 황신덕에 이어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을 맡아 남녀차별 법조항을 철폐에 주력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고인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테네시주 램버스대학과 스칼렛대학에 입학해 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는다. 귀국한 그는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YWCA(여자기독교청년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YWCA 총무 역할을 맡는다. 그곳에서 가정법 개정 운동에 박차를 가한다. 그가 첫 번째로 제안한 캠페인이 ‘혼인신고를 합시다’ 였다. 당시 많은 여성들이 자식을 낳고 살다가 젊고 많이 배운 후처(첩)가 혼인신고를 먼저 해버리는 바람에 빈손으로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후 이 운동은 축첩 반대 운동과 남녀차별적 내용이 담긴 가족법 개정운동으로 커졌고 훗날 호주제 폐지로까지 이어졌다.

평등하고 동지애적인 관계로 더욱 더 다정했던 생전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희호 여사 부부. ©뉴시스
평등하고 동지애적인 관계로 더욱 더 다정했던 생전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희호 여사 부부. ©뉴시스

 

여성운동가로 살던 그의 인생행로는 1962년 두 살 연하 김대중과 부부의 인연을 맺으며 바뀐다. 이 여사는 자서전 『동행』에 “그 사람, 김대중은 노모와 어린 두 아들을 거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 뿐만 아니라 셋방에 앓아누운 여동생도 있었다”며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곧 거세게 노크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자서전의 부제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와 같이 그의 삶은 우리 현대사의 굴곡 최전방에 있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쟁한 71년 대선 패배 이후 남편은 최고통치권자의 최대 정적이 되었고, 이 여사의 인생에도 가시밭길이 펼쳐졌다. 24시간 감시와 도청 속에 살아야 했고 망명과 납치, 구금, 연금 등이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 20년 이상을 견뎌야 했다. 1976년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남편이 구속되자 고인은 3년 가까이 석방투쟁을 벌였다. 당시 독재정권에 맞서다 가족이 투옥된 이들이 모여 양심수가족협의회(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민가협)가 만들어졌다. 고인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등과 함께 활동을 전개했다.

대통령 퇴임 후 안착한 DJ 동교동 자택에 예나 다름없이 나란히 붙어있는 ‘김대중 이희호’ 부부 문패. ‘이희호 없는 김대중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생 민주화를 향한 역경을 함께 해온 ‘동지’의 표시이자 ‘평등부부’의 상징적 증거다.  gabapentin generic for what gabapentin generic for what gabapentin generic for whatsumatriptan patch sumatriptan patch sumatriptan patch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
대통령 퇴임 후 안착한 DJ 동교동 자택에 예나 다름없이 나란히 붙어있는 ‘김대중 이희호’ 부부 문패. ‘이희호 없는 김대중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생 민주화를 향한 역경을 함께 해온 ‘동지’의 표시이자 ‘평등부부’의 상징적 증거다. ©여성신문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을 겪으면서 김대중, 이희호 두 사람은 부부라는 사적인 관계를 넘어 독재와 싸우는 조국의 지도자와 동지로 변해갔다. 부부 이름이 각각 새겨진 문패를 현관에 건 일은 이희호와 김대중의 동반자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부부 문패’는 DJ가 직접 주문해 단 것이었다.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고 말할 만큼 DJ의 진보적인 여성관은 여성운동가 아내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97년 12월 DJ는 4수 끝에 드디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고인의 나이 75세 때다. 여성·사회 운동가였던 그가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행정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여성가족부의 모태가 되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장관들 임명장 수여식 때는 부부가 동반해서 임명장을 받는 새로운 관행이 생겨났다.

고인은 그동안의 대통령 부인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독자적으로 해외순방을 하거나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 의장국으로 임시회의를 주재하고 영어로 기조연설을 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2009년 8월 남편이 서거한 뒤 고인은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맡아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해 남편이 해오던 이어 가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이희호 여사가 여성신문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이희호 여사가 여성신문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고인은 구순을 맞아 진행한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아직도 성평등한 세상은 멀었다며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여성이 여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비정규직에 여성들이 가장 많지 않습니까. 기업이나 공직의 책임 있는 자리에는 여성들이 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출산, 보육, 육아 부담도 여전히 여성들의 몫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성가족부가 제 목소리를 냈으면 합니다.”

고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진다.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전 의원과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가 조만간 구성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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