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백파선 국제포럼 개최
‘일본 도자기의 어머니’ 백파선

서울디자인재단(대표이사 최경란)은 8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일 백파선 국제학술포럼을 개최했다. /진주원 기자
서울디자인재단(대표이사 최경란)은 8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일 백파선 국제학술포럼을 개최했다. /진주원 기자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기도 한다. 조선의 도자기를 탐내던 일본이 각 지역의 유명한 도공들을 납치해 일본으로 데려갔다는 점에서 이같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400여년 전 당시 일본 도자산업의 태동기를 이끈 여성 도공 백파선(百婆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경남 김해에 살던 백파선은 정유재란 당시 남편 김태도와 함께 일본 다케오로 끌려간 후 사가현 아리타로 옮겨가 도자산업을 견인하고 조선 도공들의 리더가 된 인물이다.

서울디자인재단(대표이사 최경란)은 8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일국제학술포럼을 열어 백파선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졌다.

지금까지 일본 아리타에서는 조선 도공 이삼평을 ‘도자의 신’, ‘도자기의 시조’로 추앙하고 있지만, 함께 도자기를 만들었던 백파선은 주목받지 못했다. 백파선도 실제 이름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흰 할머니라는 의미로 후손이 지은 것이다. 아리타에서는 매년 5월 도자기축제와 도조제를 열어 이삼평을 기린다. 이삼평의 공덕비에는 ‘대은인’이라고 쓰여져 있다. 그러나 백파선에 대한 관심은 지역 차원이 아닌 백파선에 주목해 활동하고 있는 지역의 독지가인 구보타 히토시 씨가 백파선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전파시키고 있다. 

백파선은 남편 김태도가 젊은 나이에 죽자 도자기술을 배워 도공으로 일하다가 조선 도공들과 가족들 960명을 데리고 백자의 재료가 되는 백토가 풍부한 아리타로 이주해 가마를 열었다. 이후 96세까지 살면서 후계를 양성했다.

아리타의 호온지절에는 백파선의 묘가 있다. 묘비에는 백파선의 삶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담겨 있다. 다카쿠사키 미나 대진대학교 교수가 묘비의 글을 소개했다.

‘증조모(백파선)의 성은 모릅니다만, 고려·김해 출신입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를 공격하고 오는 길에 다케오 영주인 고토 이에노부가 증조모(백파선)에 도자기 만들기를 명했습니다. 스님이 간언을 해서 그 문 앞에 살고 몇 년 이 지났습니다. 이에노무 영주의 은혜를 받아 우치다 땅을 하사 받고 도자기의 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그릇과 향로를 만들어 이에노부 영주와 스님에게 바쳤습니다... 백파선의 남편은 1618년 10월 29일에 서거했습니다... 증조모는 자녀 교육에 열정적이고 모범적인 어머니였습니다. 그 후 우치다에서 히에코바로 옮겼습니다. 쿠토키야마는 훌륭한 백토를 산출해서 도자기 만들기에는 천혜의 땅이었습니다. 우리집에 있었던 조선인들은 모두 증조모를 믿고 따라왔던 사람들입니다. 1656년 3월 10일에 서거했습니다. 향년 96세였습니다. 소리높여 웃으며 아름다운 외모로 눈썹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었습니다.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귀고리를 한 구멍 흔적이 있었습니다... 1705년 3월 10일 서거 50주기에’

이혜경 백파선역사문화아카데미 대표는 조선 여인의 리더십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도자기를 통해 양국이 우호를 증진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디자인재단(대표이사 최경란)은 8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일 백파선 국제학술포럼을 개최했다. / 진주원 기자
서울디자인재단(대표이사 최경란)은 8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일 백파선 국제학술포럼을 개최했다. / 진주원 기자

 

사가현이 메이지유신의 주축세력이 된 배경에는 도공들의 영향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조용준 작가는 “일본 메이지유신의 주축세력이 조슈번(야마구치현),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사가번(사가현)이었고 세 지역의 공통점은 부유한 지역”이라면서, 각 지역별로 과거 유명한 조선 도공이 있었고 사가현은 이삼평 등 가장 많은 도공을 데려간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납치된 도공의 인원에 대해 일본은 많게는 10만명에서 적게는 3만명까지로 추정한다”고 전했다. 이 세 지역은 군제 개혁에 성공하고 최신 무기를 들인 곳이라는 것이다. “유럽으로 대량 도자기를 수출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군비를 만들 수 있었고, 사가현에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대포를 전시하는 사가신사가 있다”고 전했다.

조 작가는 백파선이라는 인물을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단지 한 개인의 업적에 그쳐서는 안 되며, 여성 도공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일본 사회에 주목하고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조 작가는 “일본에서 함께, 혹은 이후에 활동했던 조선인 후예 중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여성 사기장들이 있었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여성 사기장의 이름 한명도 떠오르지 않지만, 일본은 실용적이든 개방적이든 어떠한 이유에서 간에 여성 사기장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줬고 지금도 그들이 작업했던 유명한 가마들이 남아있다. 여성 사기장들을 한대 묶어 연구하면 백파선 개인 조명 보다 훨씬더 의미 있고 확장성 있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서상묵 백파선역사문화아카데미 원장은 “일본에 조선 도공의 송환을 요구했는데 상당히 많은 수가 거부를 했다. 조선이라는 폐쇄된 사회보다 일본이라는 개방된 사회가 더 낫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공유했던 한국과 일본 민족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일본이 백파선을 비롯한 한국 도공들을 대우해주고, 세계 최고 도자기 산업으로 발전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준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발표자들은 백파선이라는 인물을 통한 문화산업콘텐츠산업 활성화 방안과 관련해 체계적인 연구가 우선돼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상욱 원장은 “문화가 산업에 끌려가면 저급한 문화가 된다. 그럼에도 문화가 발전하려면 산업과 연계돼야 한다”면서 “문화가 산업과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지원이 우선 필요하다. 이런 토대 없이 얄팍한 우려먹기 식으로 가면 나중에는 허구와 사실이 혼돈이 올 것”이라고 경계하면서 “서두르는 것보다 충실하게 백파선이 가지는 의미, 백파선뿐만 아니라 한국 도공들의 역정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보조를 맞춰서 산업이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참석하기로 했던 구보타 히토시 관장은 행사 전날 갑작스런 병환으로 불참했다고 주최측은 밝혔다.

일본 아리타의 조선 여성도공 백파선 좌상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일본 아리타의 조선 여성도공 백파선 좌상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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