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가 뭔지 보여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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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노동자는/ 열여섯의 나이에/ 홀로 고향을 떠나와/ 자본의 시장에 내팔리었습니다/ 일당 이천오백원/ 그것이 그녀의 몸값이었습니다’(이선희-내가 아는 한 노동자). 요즘 사람들 눈으로 보면 좀 고루(?)할지도 모를 싯구다. 어느 시인의 푸념대로 ‘잘 팔리지 않는 시’인 탓이다.

이선희(41) 민주노동당 종로갑지구당 위원장은 안 팔리는 시를 쓴다. 그가 아는 ‘한 노동자’는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새 세상을 만들어 줄 선구자이리라 믿기 때문이다. 현실은 옛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 노동자는 어쩌면 이 위원장 자신일지도 모를 일.

“진보정당다운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생활을 바꾸는 정치, 삶의 질을 높이는 정치를 일상적으로 주민들과 함께 하는 거죠. 내년 총선에 일찌감치 출사표를 낸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위원장은 2000년 민노당 창당 때 여성위원장을 맡아 2년 넘게 당과 진보진영 내 양성평등을 위해 힘써온 인물. 최근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지구당위원장으로 뽑힌 뒤엔 내년 총선 때까지 지역주민들에게 ‘진보정치’를 뿌리내리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

“종로는 정치·행정의 중심지이자, 영세상인과 노점상이 밀집한 곳입니다. 그만큼 생활과 의식의 폭이 넓어요. 젊은 학생부터 노인까지, 카페와 노점상 등 모든 삶의 방식이 공존하는 마로니에공원이 대표적이죠.”

보수 정치판에 신물이 난 보통사람들에게 진보정치와 민노당을 알리기 이 위원장이 낸 묘안은 ‘벼룩시장’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마로니에공원에 시장을 열어 우선 지역주민과 얼굴을 익히고, 그 수익금을 노점상 등 주민들한테 다시 돌려주겠다는 것. 나와 우리를 함께 생각하는 만남과 나눔의 과정이 곧 생활정치의 시작이란 얘기다.

이 밖에도 수많은 만남의 방식을 고안했지만, 이 위원장은 “남들이 따라 하면 곤란하다”며 후일을 도모하잔다. 자신감이 넘쳤다. “당선 가능성이요?(웃음) 저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년을 아주 잘 쓰고 싶어요.”

이 위원장한테서 민노당 지구당위원장이란 정체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빛바랜 청바지에 붉은 가죽 웃옷을 걸친 그에게서 활동가의 ‘전형’을 찾을 수 없다. 얼굴도 나이보다 열 살은 앳돼 보인다. 그런 그를 누군가 ‘매력적인 활동가’라 불렀다.

“결혼을 한 사람은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요. 죽을 때까지 함께 살고 싶다든가 그런 거요. 제가 결혼 안 한 이유가 특별히 있겠어요?” 뭇 남성 눈길을 많이 끌었을 것 같은데 결혼을 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냐는 우문에 이런 현답이 돌아왔다.

과거 그의 삶은 고단했다. 생활에 쪼들려 고교 졸업 뒤 바로 회사생활을 시작, 5년 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좀 더 넓고 나은 세상을 보려고 곗돈을 타 대학을 갔고, ‘운동’을 알았다. 예비 시인인 국문학도였지만, 졸업도 하기 전에 현장에 투신한 뒤, 90년대 초반 구로공단 최대 노조였던 AMK노조에서 조직차장으로 일하다 해고됐다.

“여성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법정투쟁을 하면서 여성문제에 새롭게 눈을 떴죠. 패소했지만 의미 있었고, 나중에 청년운동을 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96년엔 민주당 임종석 의원 등이 함께 하기도 한 포럼2001을 꾸렸고, 97년 대선 때는 국민승리21 청년부위원장을 맡아 진보정당 창당 대열에 합류했다.

어렸을 적 미싱사였던 이 위원장은 자신의 가게 내부를 손수 꾸미고 옷가지도 만드는 재주가 있다. “옷 만들 때 첫 바느질이 중요해요. 처음이 잘못되면 옷이 금방 울죠. 잘못을 발견하면 그 전으로 과감히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정치도 그런 것 아닐까요.” 이 위원장의 요즘 화두다.

▲62년 충북 청주 ▲82년 생산직 노동자로 사회생활 시작 ▲86년 성균관대 국문과 입학 ▲90년 AMK코리아 노동조합 조직차장 ▲96년 포럼2001 대표 ▲97년 국민승리21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2000년 민주노동당 여성위원장 ▲2003년 3월 민노당 종로지구당위원장.

배영환 기자ddarijoa@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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