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무용가 제자 성추행 혐의
‘카르텔’이 피해자 목소리 막았나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이 10일 서울 종로 다시세운광장에서 ‘#미투, 세상을부수는말들’ 행사를 열어 참가자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이 지난해 11월 10일 서울 종로 다시세운광장에서 ‘#미투, 세상을부수는말들’ 행사를 열어 참가자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1일 미디어오늘 보도로 현대무용가 류모씨의 제자 성추행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에 따르면 류씨는 2015년 자신에게 무용 실기 개인 교습을 받은 전공생 A씨를 여러 차례 성추행하여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속되었다. 류씨는 유명 현대무용단의 대표로, 그의 아내는 서울 소재 대학 무용예술학부의 학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류씨는 이 대학에 강사로 출강 중이었다. 류씨는 자신의 개인 연습실에서 A씨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골라 추행을 저질렀고, A씨는 이 사실을 류씨가 운영하고 있는 무용단의 다른 무용수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한 다음에야 피해를 멈출 수 있었다.

A씨는 자신의 스승이자 류 씨의 아내인 이 교수를 찾아가 류 씨에게 당한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으나 이 교수가 ‘네가 착각하는 게 아니냐’ ‘지난 일이니 다 잊으라’는 반응을 보이자 무용에 대한 꿈을 포기했다.

A씨가 겪은 사건은 2016년 ‘#ㅇㅇ계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 운동으로 시작되어 지난해 미투 운동으로 본격화된 성범죄 사건 공론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류 씨는 행위가 있었음을 시인하면서도 합의된 관계였고 피해자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다른 성범죄 사건의 가해자들과 하등 다를 것 없는 변명이다. 그리고 피해자에게 “다 잊으라”고 했다고 알려진 이 교수의 태도는 숱한 성범죄 사건에서 남편이 저지른 성범죄의 또 다른 피해자인 동시에 남편의 편에 서서 피해자의 입을 막거나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나서며 또 다른 가해자로 변신하는 가해자의 아내들이 보인 태도와 궤를 함께 한다.

무용인들은 사건이 보도된 기사를 개인 SNS에 공유하면서도 사건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내놓기보다는 ‘공유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며 말을 아끼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예술계가 예술계 특유의 무엇이라고 곧잘 말하는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인 좁은 세계’인 속성 때문이다.

무용계의 인간관계는 교수와 학생 또는 교수와 강사 및 강사와 학생, 학원 강사와 학원생 등 스승과 제자로 수렴되는 관계를 비롯해 안무가(또는 무용단의 예술감독)와 무용수로 맺는 수직적인 관계 외에도 교수이자 안무가이자 예술감독으로 동료나 선후배 관계를, 무용가와 평론가 또는 무용가와 기획자로 상호의존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춤 또는 공연이라는 키워드로 긴밀하게 연결된 무용인들의 네트워크는 ‘좁은 세계 내에서 모두가 알고 지내는 사이’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이익집단의 성격을 갖는다.

좁은 세계 안에서 인간관계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깝고, 가까운 거리는 폐쇄적인 친밀함을 만들어내며 이 친밀함은 정서적인 감각이라기보다는 이해관계가 개입된 공범의식에 가깝다. 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우리가 남이가’의 정신이요, 한 단어로 요약하면 ‘카르텔’이 된다. 누구나 이 카르텔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이 카르텔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무용계의 침묵과 그 침묵이 만들어내는 악순환은 이 카르텔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모두가 카르텔의 피해자를 자처할 뿐 스스로를 카르텔이 건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카르텔의 협력자나 부역자 혹은 방관자의 위치에 놓지는 않는다. 침묵은 계속되고 악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이 강고한 무용계에서도 성폭력 고발의 목소리는 꾸준히 있어왔다. 지난해에는 한예종 전통예술원에서 한 남학생이 강사 최 모씨와 학생 홍 모씨의 유사강간과 성추행을 SNS에 폭로하며 교내 대자보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창원대 무용과에서는 교수가 학생들을 노래방으로 데리고 가 성추행한 것에 대한 고발이 이루어져 창원중부경찰서에서 해당 교수를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로 검찰 송치한 바 있다.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는 단원들이 릴레이 시위로 전 감독대행 최 모씨와 보직단원 양 모씨가 단원들의 외모와 신체에 대한 성희롱을 하고 지위를 악용해 출연을 배제시키는 등의 갑질을 했다며 고발했고, 한 무용웹진을 통해 무용학 박사 김 모씨가 십수 년 전 유학에서 돌아온 뒤 모교 무용과가 속해 있던 체육대학의 학장이자 체육회의 거물인 교수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뒤늦게 고백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용기 있는 피해자의 목소리들이 동조를 얻지 못한 채 파편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데 있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가해자의 뻔뻔함에 분노하지만 이러한 공감과 분노는 피해자의 외로운 싸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옆에서 더 피해자연하는 모습으로, “넌 이제 무용을 그만뒀으니 말할 수 있잖아”라거나, “차라리 무용을 그만둔 네가 부러워” 같은 2차 가해의 방향으로 표출되곤 한다. 피해자를 향해 공감의 언어를 구사하는 듯하면서도 피해자의 위치에 대해서마저 부러움을 표하며 싸우지 못하는 자신의 입장을 더 불행해하는, 이른바 ‘불행 배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모두가 피해자를 자처하며 부역자 혹은 방관자라는 것은 외면하기 때문이다.

무용계는 이미 20여 년 전에 한번 피해자의 목소리를 묵살한 바 있다. 1997년 중앙대에서 남자 제자들에 대한 국모 교수의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싸움 끝에 교수는 피해자 두 명의 성추행 고소에 대해 한 명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받고 다른 한 명은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학교에서는 국 교수 개인에 대한 처벌을 한국무용계와 무용학과의 손실로 받아들이고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이는 알력 관계에 있던 교수 세력의 음해라는 음모론도 부각되었다. 학생회장의 입을 통해 왜 성추행이 있었던 직후에는 가만히 있다가 시간이 지나서 공론화하냐며 의도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2차 가해도 자행되었다.

국 전 교수는 대학 교수와 공공단체장이라는 직위는 잃었지만 이후에도 국공립단체에서 제작하는 신작 의뢰를 받으며 창작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고 그가 이끄는 개인무용단은 각종 지원금사업에 선정되어 국고보조금 지원을 받으며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2017년에는 한 협회를 통해 전통춤 이수자인 자신의 춤을 명작무로 지정받기도 했다. 미디어오늘에서 보도한 류씨는 국 전 교수로부터 전통춤을 배우기도 했는데, 이는 무용계의 카르텔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류씨를 상대로 한 법정 싸움이 어떤 결말을 짓게 되건 간에, 모두가 피해자를 자처하며 피해자 편에 설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류씨에게도 국 전 교수와 같은 기회와 명예가 다시 주어질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용인들이 피해자의 곁에 섰을 때만이 무용계의 회복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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