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하룡 작/최진아 연출의 ‘뼈의 기행’

거친 세상 살아가는
3대의 뼈아픈 이야기
여행가방 이용한 무대 독특

연극 ‘뼈의 기행’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뼈의 기행’ 중 한 장면 ⓒ강일중

 

해방 직후 만주땅에서 철길을 따라 내려와 혈혈단신 경상도에 정착하게 된 13세 소년 준길. 3대 독자의 등을 떠밀며 “먼저 가 있으면 곧 뒤따라 가마.”라던 아버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 고아 같은 처지가 되어 머슴살이를 비롯해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아온 준길은 이제 70대 초반.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이가 되면서 그는 머나먼 타지에서 세상을 뜬 아버지의 유골을 고향 땅에 이장하겠다는 오랜 생각을 겨우 실천에 옮기게 된다.

서울 용산구 서계동의 백성희장민호극장 무대 위에 오른 연극 ‘뼈의 기행’(백하룡 작, 최진아 연출, 6월 16일까지)은 준길이 어렵사리 중국 흑룡강성의 작은 마을을 찾아 선친의 유골을 수습한 후 결국 경상북도의 선산에 뼛가루를 뿌리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비교적 덤덤하게 관객에게 보여준다.

큰 틀에서 볼 때 소재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연극은 그러나 모진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인간들의 모습을 여러 장면을 통해 보여주면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은 또 숱한 고통을 초래한 현대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떠돌며 살아야 했으면서도 서로를 불신하고 배척하는 민족의 문제, 세대 간 갈등과 대립의 이미지 등을 드러낸다.

연극 ‘뼈의 기행’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뼈의 기행’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의 시간은 2004년 가을로, 아들 학종과 함께 아버지의 유골이 든 낡은 트렁크를 배편으로 한국에 부치려는 준길의 시도가 거듭 좌절되며 답답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준길은 아들의 도움이 아쉽고, 학종은 조부의 유골을 이장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려 하지만 부자는 끝없이 티격태격한다. 아들은 특히 조부의 유골을 화장해 뼛가루로 만들어 조그만 상자에 넣어 가면 간단할 일을 굳이 뼈 상태 그대로 가지고 가겠다는 아버지의 생각이 마땅치 않다. 준길은 아들이 평소 집안 돈을 까먹고, 이혼까지 한데다 헤어진 아내 앞에서 설설 기는 것이 꼴 보기 싫은 터에 아버지의 일에 시비나 거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준길이 유교적 사고에 젖어있다면, 학종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실리를 따진다.

준길의 입장에서는 ‘못난 아들’이지만 작가가 학종 역시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낙오된 채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희생자’라는 측은지심으로 작품에서 그리고 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피로한 몸으로 여관방에서 잠든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학종은 중얼거린다.

연극 ‘뼈의 기행’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뼈의 기행’ 중 한 장면 ⓒ강일중

“아버지도 제가 밉지요. 저도 아버지가 밉습니다. 웬 줄 아세요. 제 인생은 순 아버지 한풀이였거든요. 공부 못한 한으로 저 대학원 보낸 겁니다. 출세 못 한 한으로 공무원 시킨 거고요. … 자신이 고아처럼 자라 사람을 못 믿으니까 나보고도 사람들 믿지 말라 그랬고요.”

연극은 그 밖에도 흑룡강성에 사는 학종의 고종사촌으로 밀입국해서라도 한국에 가 큰돈을 벌어보려는 환상에 젖은 영욱,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장사로 유골 밀반출의 브로커 역할을 하는 용정댁 등의 인물을 등장시켜 많은 사람이 도덕과 윤리보다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데 혈안이 된 세태를 꼬집는다.

준길이 어렸을 적 흑룡강성 마을에서 자주 봤던 붉은 빛의 산작약을 떠올리며 하는 말을 비롯해 서정성이 돋보이는 장면들이 여럿 있다. 또 유골을 제때 가져가지 못하게 되면서 좌절하는 준길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과거 이별의 순간 등 기억 속 시간이 꿈같은 장면으로 무대에서 펼쳐지면서 마음을 아리게 한다.

준길과 학종 부자가 사용하는 거친 경상도 방언, 용정댁이 쓰는 독특한 조선족 억양과 어휘 등이 맛깔스럽다. 이장을 위한 부자의 여정이 내용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반영, 크고 작은 여행 가방들이 무대 도구로 활용된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약 30개 가방이 장면에 따라 도구나 세트 역할을 하며 무대의 이곳저곳에 배치되면서 거리와 여관, 부두, 기차 안 등 다양한 극중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다.

강일중 공연 칼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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