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청소년을
극단으로 몰고가는
존재의 등급···
새로운 진화가 필요한 시기다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대가리 박고 자살하자’(이하 대박자)라는 노래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 유튜브 조회수는 백 만이 넘고 관련 동영상도 100여개에 이른다. 10대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놀랍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경쾌한 멜로디를 가진 이 극단적인 노래가 한국 청소년의 삶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 이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사회가 10대를 대하는 방식은 엄격한 규율과 체벌, 무조건적 강요 등 물리적 폭력이 주를 이루었다. 여전히 그와 같은 면이 용인되고 있으나, 한국사회가 후기산업사회로 변화함과 동시에 10대에 대한 통치 역시 교묘히 그 방식이 변했다. 자발적 복종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대화’의 등장이다. 대박자 노래에 대한 처방 가운데 하나 역시 10대와 ‘대화’다. 표면적으로는 민주적이다. 그러나 비청소년과 청소년이 대화에 참여할 때 다른 종류의 역사적 경험, 자원, 정보를 가지고 입장한다는 것은 생략되어 있다.

대화라는 투쟁과 경합의 장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은 중립을 가장한 지배문화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내신 등급과 직업명, 취업률 등의 숫자 사이에서 해명해야 한다. 자기 책임은 다하지 않고 혜택만 바라는 ‘등골브레이커’는 아니라는 증명도 해야 한다. 대화에 참여한 이상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표현하여 ‘선택’도 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대화 패턴이 그러하듯, 비청소년과 청소년의 대화는 ‘선택했으니 책임져라’, ‘네 할 일을 다하고, 그때 말해라’ 로 귀결된다. 뭐가 되고 싶냐고 끊임없이 물은 뒤 (일명 꿈고문), 그게 되고 싶다면 내신은 몇 등급이어야 하고, 대학은 무슨 과로 가야하니, 지금 공부를 몇 시간 해야한다는 플랜이 짜여진다. 예술로 자기를 표현하고 싶으면 예체능 입시학원을 다니면 된다. 선택지 중에는 ‘좋은 대접 받으면서 적당히 살고 싶으면’ 같은 모호해서 빠져나갈 수 없는 보기도 있다. 혹 네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집을 나가 스스로 먹고 살 수 있으면 해도 된다. 부모세대와 10대간의 자원과 정보량이 비대칭적이라는 사실과 청소년의 사회경제적 권리보장이 미비하다는 맥락은 생략된다. 삶은 한결 같기 보단 여러 갈래의 결이 있다는 것도 말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제 ‘선택’ 했으니 ‘책임’져야 한다.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가 없으면 자기 삶에 무책임한 패배자라는 심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순결한 피해자라는 면죄부 없이 노력을 ‘못’하고 ‘안’했으면, 쓸모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10대의 언어를 빌리자면 입을 ‘싸물어야’ 한다. 고도화된 폭력은 이해할 수 없는 형태를 띠지 않는다. 내가 합의하고 자초했으며,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폭력이야 말로 사람을 파괴한다. 도망칠 수도, 변호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무서운 노래를 부르다니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데’라는 말은 무기력하다. 비정규직의 생명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청소년들은 매일 목격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존재에 등급이 있다고 말한다. 10대의 삶을 탐구하는 청소년 연구원들에 의하면, “3등급 이하는 대학도 못가면서 부모 피 빨아먹는 존재”라고 다름아닌 진로교육 시간에 교실에서 공공연히 말해진다고 한다. 보고 배운대로 차별과 혐오는 실천된다. 한국사회에는 몇 등급 이하의 삶은 무가치하다는 사실에 합리적으로 찬성하는 ‘내러티브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3등급 이하면 최소 77%이다. 이는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 1등급은 이 노래로부터 자유로울까? 서울대 학생들의 46% 이상이 우울증을 겪고 있으며, 아이비리그 대학들 역시 학생들의 높은 자살율로 위기를 겪고 있다. 1등급은 존재가 아니라 조건이고, 이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언제든 필요 없는 존재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사회는 누구에게도 안전할 수 없다.

문제는 현재 지배문화의 언어가 청소년에게 얼만큼 쓸모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청소년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으며 어느 때보다도 예측되지 않는 미래로 향하고 있다. 초핵가족 관계와 100개가 넘는 메시지가 쌓인 대화창들, 인공지능 음성서비스와 편의점 먹거리는 지금의 10대들이 이 전세대와는 다른 몸과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변화를 헤아리지 않고 제시하는 선택지들을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변화를 감지해야 한다는 것이 코딩을 배워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보다는 우선 알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진화가 필요한 시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양한 시도는 우리 인식의 지평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해받지 못했던 시도가 꽃필 수 있다.

이제 인정해야 한다.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없음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가 가장 위태롭다. 선택과 책임의 논리가 아닌 환대와 우정으로 새로운 세대를 맞이해야 한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자로서 대화에 임해야 한다. 이때의 대화는 설득과 포섭의 안온한 공간이 아니라, 나 자신과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과정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 곳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무조건적인 환대를 받아봤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교실 이데아를 따라 부르던 부모 세대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장년도, 긴 노동끝에 ‘역할 없는 역할’을 맡게 된 노년도 존재 그 자체로 중하다는 말을 들어본 이가 있을까. 2019년 유례없는 시도를 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10대만은 아닌 듯 하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