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여우들의 파티> 관람 후 ‘취중방담기’

4월 22일 저녁, 페미니스트 작가 웬디 와서스타인의 번안극이며 드라마 의 연극판으로 불리는 <여우들의 파티>를 보고 난 후 세 여자가 대학로 앞 어느 삼겹살 집에 모였다. 스물여덟 살의 당당하고 멋진 그녀들. 진영과 양진은 대학동창이고, 영희는 그들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친구다. 교보생명 수퍼바이저 심영희, 예술의전당 공연장 운영팀 윤진영, 외국인 회사를 정리하고 유학을 준비중인 정양진. 소주잔이 함께 ‘쨍∼’하고 부딪치면서 그녀들의 수다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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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의 그녀들. 좌로부터 심영희, 정양진, 윤진영. <사진·민원기 기자>

진영:왜 여성들의 연극은 저렇게 말이 많은 거야. 왜 저렇게 수다스러워야 돼?

양진:남자들이 왜곡할 수밖에 없어.

진영:그런데 여자란 자기 감정을 드러내고 솔직하게 마음을 나눠야만 정서가 순화되잖아. 그저 수다스럽게 느껴지는 거라 생각해. 참, 극중에 하이틴 로맨스 즐겨 읽는 애 있잖아. 양진이가 딱 그래. 성에 대해서 굉장히 개방적이고 탐구하려는 정신이 엄청 강했지.

양진:내가 그랬냐? 예를 들어봐라. 사실 영희랑 나는 이제 성을 무의미하게 봐. 이론적 지식이 많으니까 실전에 들어가면 상당히 두려워 하구. 진영이야말로 알면 더 깜짝 놀랠 걸. 소개팅에 나가서 바로 키스를 하고 온 거야. (부러운 듯 탄성을 지른다.)

진영:하하하. 그게 왜?

양진:난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진 못해. 아니 아직까진 키스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어. 모르는 남자랑 키스를 하거나 그걸 하면 어떤 느낌이 들까?

영희:난 아닌데. 넌 비정상이네. 그런 생각하는 건 자연스런 거야.

진영:그게 어디 판단만으로 되는 거니? 끌리는 거지. (눈치를 보며) 근데 야, 너 이런 거 남자친구가 들어도 되냐?

영희:솔직히 요즘 대학생들이 연극처럼 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너무 고리타분하게 살았던 거 아냐. 그게 대세라면 나도 20대 마지막에 불꽃을 태우고 싶다 이거지. (다들 뒤집어진다.)

진영:그래, 현실에 참여해. 이제 참여정분데… 대학 땐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늘 고민했잖아. 난 갑갑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게 이 바닥까지 오는 통과의례였다고 해도 답답한 정체성을 찾는 건 힘들었어.

양진:지금은 나름대로 소속감이라는 게 있잖아. 9시면 출근하고, 근데 대학은 나를 틀어 매어줄 그런 곳이 못 됐어. 그런 게 싫었어.

영희:난 대학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꼭 뭘 안 해도 되고 뭔가에 쫓기지 않아도 되고.

진영:“난 매력이 너무 많아. 그런데 그게 천박함과 혼돈이 돼. 그런 내 가치를 흔들리고 싶지 않아.” 그 대사 맞는지 모르겠어. 늘 아랫도리에 관심 있는 남자들의 생각에 얽매일 필요가 있냐? 나보고도 회사 언니들이 회사 안에서 말 나오지 않을까 조심하라는데 걱정하진 않아. 이미 25, 6살 때부터 겪어 온 건데. 여전히 역겨운 문제지.

영희:난 “대학 졸업을 하면 이렇게 돼 있을 거야.” 그 대사. 실제 겪어보면 무의미한데도 또 이제 30대가 된다니까 30대에 대한 준비를 해야 되지 않을까 걱정돼.

진영:나는 길게 뭘 위한다는 건 싫더라. 그냥 짧게 짧게, 당장 서른을 바라봐야지.

영희:어제 애 낳은 친구를 만났는데 낳기 전엔 무섭지만 애를 낳으면 또 달라진대.

진영:그래, 그걸 한번 경험해 보고 싶어. (야유를 보내는 영희와 양진)

양진:난 뭔가 딱 떠오르는 대사가 없었어. 공감한 건 다들 성공지상주의에 찌들려 가지고 사는구나 하는 거. 마지막에 사감 선생님한테 “나는 뭔가 돼 있을 거예요.”라고 하잖아. 한 게 없으니까 미래를 얘기하는 거야. 늘 남들과 비교하면서. 고등학교 때 학교에 성적표가 붙으면 제일 먼저 달려가 친구와 내 성적을 비교해 봤어. 말로는 우리 열심히 하자고 해 놓고선 난 항상 그 친구보다 성적이 좋아야 했거든.

진영:여자는 항상 자기에게 위협적인 존재와 가까운 건가.

양진:그런데 대학 들어가면서부터는 남과 비교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과 비교하는 거지. 난 동창회가 너무 싫거든. 아이러브스쿨에 들어가지도 않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어색함. 그래도 반갑게 오버를 한다, 오랜만이라구.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면서 쟤 옛날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 정도구나 비교나 하지.

진영:남들과 비교해서 자기가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야.

양진:근데 동창회 자리에서는 남자들이 더 심해. 얘기는 안 하지만 그 스파클이~장난이 아니잖아. ‘너 멋져 보인다. 건강해 보인다.’ 이 한마디만 툭 던지고 바로 술을 마시지. 그걸로 끝이야. 하지만 집에 들어가서 생각한다.

영희:여자애들 대화 중에 학벌 얘기 굉장히 많이 나왔잖아. 대한민국 사회에서 학벌을 빼놓곤 대화가 안되지? 남들 공부할 때 걘 뭐 했냐는 거지. 하나를 볼 때 열을 안다는 생각이야.

양진:레벨이란 연고대 이상이 아니야. 어느 정도 말은 통해야지. 며칠 전에 전동칫솔을 샀는데 그게 전자기 유도의 원리로 움직이는 거래. 전자기 유도 알지? 학벌을 따지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대화가 되기 때문이지.

진영: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고단하게 노력했을 과정을 대단하게 봐.

양진:아르바이트건 직장을 들어가건 어느 집단에서건 항상 난 막내였는데 어느새 모임에서 날 보고 시집갈 나이라고 하잖아. 스물아홉, 서른이 되는 게 너무 싫어.

진영:스물아홉은 스물아홉대로 서른은 서른대로 그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게 있어 좋아.

양진:그래서 요즘 어떻게 하면 화장을 안한 것처럼 깨끗하게 피부 표현을 할까 생각해. 아무리 화장을 공들여 찍어도 5년 전 사진과 비교하면 화장을 안 한 그 때가 너무 이쁜 거야. 과거에 집착하는 건 아닌데 다가올 나이에 대해 두려움이 있어. 스물아홉 마지막 날에는 정말 멋지게 ‘셀러브레잇’하던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낼 거야.

현주 기자soon@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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