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 화가 정은혜
악착 같이 통합교육 받아
대학까지 어렵게 졸업했지만
장애인 찾는 직장 없어 고립
청소일 하다 우연히 잡은 연필
재능 찾고 ‘시선강박’도 나아

올해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
이젠 은혜씨도 전업작가
예술적 재능 가진 장애인들
활동 할 수 있는 시스템 필요

‘은혜씨의 얼굴 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체부동 갤러리 B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은혜 작가.  ©이정실 사진기자
‘은혜씨의 얼굴 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체부동 갤러리 B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은혜 작가. ©이정실 사진기자

 

‘나를 사랑스러운 딸로 태어나게 한 엄마’

서울 서촌의 자그마한 갤러리B 쇼윈도에 걸린 여성의 그림 옆에 적힌 이 작은 글귀가 마음을 붙잡았다.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수백 개의 그림이 한 눈에 들어왔다. 16.52㎡(5평) 남짓한 공간을 빼곡히 채운 그림은 모두 누군가의 얼굴들이다. 이 곳에선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얼굴을 그린 작가 정은혜(29)씨의 개인전 ‘은혜씨의 얼굴’ 전이 한창이다. 가수 김정호의 ‘하얀 나비’가 흐르는 갤러리에선 파란색 의자에 앉은 정 작가가 그림 작업에 한창이었다. ‘누구지?’라는 눈으로 기자를 바라보던 정 작가에게 비단향꽃무로 만든 작은 꽃다발을 건네니 희미한 미소가 돌아왔다.

정 작가의 그림은 정교하다. 거칠지만 주름 하나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표현한 인물화다. 2014년 우연한 기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가 지금까지 그린 사람은 2000명이 넘는다. 경기도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에 셀러로 참여해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과 마주 앉은 정 작가는 “예쁘게 그려주세요”라며 미소짓는 사람들에게 “에이~ 다 예쁘구만”하고 답하며 수천 장의 그림을 그렸다. 2000장의 그림을 통해 2000개의 미소를 만났고, 정 작가는 그렇게 세상과 연결됐다.

정 작가와의 인터뷰를 곁에서 도운 이는 어머니이자 만화가인 장차현실씨다. 정 작가는 인터뷰를 하며 엄마의 말에 중간중간 짧은 설명을 덧붙이거나 반박을 하며 함께 인터뷰를 했다. 어머니 장 작가는 『작은여자 큰여자 사이에 낀 두남자』 『엄마 외로운 거 그만하고 밥먹자』 『또리네 집』 등 작품을 통해 여성과 장애에 대한 사회의 편견에 맞선 경험을 세상에 알렸다. 지금은 정 작가의 자칭 매니저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만화가를 어머니로 뒀으니 자연스레 그림을 접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정 작가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건 5년 전이다.

장 작가는 자타 인정하는 열혈 엄마다.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딸을 위해 장애인 교육권을 외쳤고, 통합교육을 시키고, 대학 교육까지 마쳤다.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벌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내딛으려 했지만 발달장애를 가진 정 작가를 팔 벌려 맞는 일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정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에서 무기력한 시간을 견뎌내는 일 뿐이었다. 집 안에서의 고립은 정 작가의 몸과 마음도 병들게 했다.

“가장 활발해야 할 20대에 집에서만 생활을 하다보니 틱이 하나둘 씩 늘어났어요. 이를 갈고, 말을 더듬기도 하고요. 특히 시선강박 때문에 힘들었어요. 얼마나 심했는지 식사 시간에도 가족들 모두 밥 그릇만 보고 밥을 먹어야 했어요. 눈이라도 마주치면 버럭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통에. 시선강박이 심해지니 조현증까지 왔어요.”

정 작가의 고통은 어머니에게 이어졌다. 함께 4년을 공황장애로 고생해야 했다. 나락으로만 떨어질 것만 같던 일상이 반전된 건 장차현실씨가 화실 ‘소꼽’을 열었을 때부터였다.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러 화실에 온 정 작가는 그림을 배우던 중학생들 곁에서 어깨너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저 “꽤 잘하네” “재밌게 그리네” 정도로 생각했던 장 작가는 어느날 향수 화보를 보고 그린 그림에 깜짝 놀랐다.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처럼 독특한 힘이 느껴졌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체부동 갤러리 B에서 오는 6월 4일까지 열리는 정은혜 작가의 ‘은혜씨의 얼굴 전’이 열린다
서울 종로구 체부동 갤러리 B에서 오는 6월 4일까지 열리는 정은혜 작가의 ‘은혜씨의 얼굴 전’이 열린다

 

장 작가는 화실 안쪽에 딸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연필을 이용해 선으로 그림을 채우는 정 작가는 사진을 보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났다. 하지만 작업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그림만 그리는 정 작가의 뒷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나선 게 문호리 리버마켓이다. 그림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세상과 연결되길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4년이라는 시간은 정 작가를 ‘작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올 초 국내 첫 장애 예술가를 위한 서울시창작공간 잠실창작스튜디오의 입주 작가로 선정됐다. 복지관에서 청소 일을 병행하던 겸업 작가는 이제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전업 작가로 우뚝 섰다. 그림은 주문 제작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소장하는 원화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완판 작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최근에는 채색 작업도 시작해 보폭을 넓히고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정 작가를 괴롭히던 고통도 함께 사라졌다.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정 작가는 저마다 가진 개성을 포착하고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림 안에서는 저마다의 개성이 도드라진다.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다양한 모습이야 말로 그에게는 가장 좋은 그림 소재다.

“사람들 얼굴이 다 다르잖아요. 다 마음에 들어요. 다 다른 사람들이에요.”

묘사가 세밀해지면서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점점 늘고 있다. 그림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도 그만큼 늘어난다. 그의 작업은 발달장애인이 가진 관계와 소통의 문제를 드러낸다.

정 작가는 그림말고도 노래, 뜨개질을 좋아한다고 했다. 가수 중에 양희은, 이문세, 이선희를 좋아해 그림을 그릴 때면 늘 휴대전화와 블루투스 스피커를 준비해 음악을 틀어놓는다. ‘나를 사랑스러운 딸로 태어나게 한 엄마’의 취향을 고스란히 물려 받았다. 그런 엄마는 더 많은 발달장애인들도 예술을 통해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최근 발달장애 예술인을 위한 공간으로 유명한 일본 나라 현의 ‘민들레’에 다녀왔다.

“발달장애인이 예술활동을 도구 삼아 세상에 나가기를 바래요. 시설에 가지 않고 지역 사회 안에 자리 잡는 그런 삶이요. 은혜가 이런 삶을 몸소 보여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번 전시는 6월 4일까지 갤러리B(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7길 5)에서 열린다.

정은혜 작가의 ‘은혜씨의 얼굴 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체부동 갤러리 B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어머니 장차현실씨(사진 왼쪽)와 정은혜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정은혜 작가의 ‘은혜씨의 얼굴 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체부동 갤러리 B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어머니 장차현실씨(사진 왼쪽)와 정은혜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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