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뺏긴 외규장각 의궤
145년만에 되찾은 박병선 박사
한국 남성 서지학자들의 무시,
외교관료들의 몰이해로 어려움도
‘조선서지’ 저자 모리스 쿠랑·
프랑스 공사 콜랑 드 플랑시와
시대·장소 뛰어 넘어 ‘협업’

박병선 박사free prescription cards sporturfintl.com coupon for cialis
박병선 박사

“가슴 뭉클하고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제 개인의 의미가 아니다… 1955년 이후 독일을 비롯 프랑스 곳곳… 해군청에 관련된 모든 곳곳을 다 뒤졌지만 가져간 고서들을 찾지 못해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의해서 [파괴된 줄 알았다]… 그러다 우연히… 의궤를 대여라는 말이 없게 한국에 영원히 남도록, 다시는 프랑스에 가지 않게 간구히 부탁드린다.”

2011년 역사학자 박병선(1928-2011)이 1866년 프랑스가 약탈해 갔던 외규장각 ‘의궤’ (조선왕실 의례 기록) 297권을 찾아 귀국하면서 기자회견장에서 밝힌 소감이다.  젊은 처자가 집안의 금괴를 훔쳐간 늑대 굴에 들어가 어렵게 찾아낸 금괴를83세의 노인이 되어 마침내 집에 가지고 돌아왔다는 동화 속 이야기 같다. 생생하게 벌어진 우리의 역사이다.

젊은 여성 박병선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1955년, 5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참혹한 전쟁의 후유증으로 사회엔 냉소적 자조와 절망감이 팽배했던 때였다(영화 오발탄 1961 참조).  역사학도로서 박병선은 상이군인들과 전쟁고아들, 전쟁으로 외상을 입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넘치는 사회에서 우리모두를 위한 역사적 자신감을 찾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게된다. 가자 ! 프랑스로 가자,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알려진 ‘직지심체요절’(직지)도 거기에 있다는데 찾아내고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만은 반드시 찾아오겠다고! 

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뤄나갔다. 고서들을 찾기 위해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1967년 감격적으로 직지를 발견했다. 뛰는 심장을 누르며 장시간 실험과정을 거쳐서 성공한 고증결과를 학회에 발표함으로써 직지가 구텐베르그의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선 금속활자본이라고 국제적 인정을 받아냈다. 박병선은 이 쾌거를 인생 최고의 감격으로 회고한다.  후에 그는 베르사이에 있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파손본 창고에서 마침내 의궤도 발견해서 그의 유학결심을 다 이루고 위와 같이 반환 기자회견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선 ‘반역자’처럼 여겨져서 권고사직으로 직장을 잃는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더 큰 상처는 한국의 남성 서지학자들과 주체적 양식을 망각한 외교 관료들의 몰이해였다고 한다. 반복된 고달픈 역경에도 불구하고 빼앗긴 고서들을 찾아내서 이른바 ‘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을 반성시키고 한국민들의 주체적 자각과 실행을 끌어내고자 했던 박병선의 투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거기엔 그를 학문적으로 자극했던 유럽 한국학 연구의 시조인 프랑스 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과의 고서를 통한 정신적 경쟁과 ‘협업’에 있었다고 본다.

거의 ‘불가사의’하게 기념비적인 ‘한국서지’의 저자는 프랑스 공관의 통역서기였던 모리스 쿠랑이다. 그는 2년도 안되는 조선 체류 동안 (1890-1892) 조선도서 3,821종을 수집해서 책하나 하나에 우수한 해제를 달아 프랑스에서 4권의 책으로 펴냈다(1894-1901). 1946년 그의 정평이 난 긴 ‘서문’만이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었지만 이 서문은 역사학도 박병선에게 전기에 감전된 것과 같은 충격을 줬으리라 본다. 박병선은 쿠랑의 ‘한국서지’ 저술에 필적하는 열정적 에너지를 바탕으로  우리고서를 찾아내서 연구를 더해 한국으로 찾아가는데 그의 그칠 줄 모르는 투지와 저력을 떨쳤다. 구한 말 비운에 떨어진 조선을 연민의 대상으로 보았던 ‘쿠랑의 후예들’에게 한국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임을 깨쳐준 것이다.   

대한제국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다. 프랑스 공사였던 콜랑 드 플랑쉬(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가 고종을 설득한 결과였다. 쿠랑의 전 상관이기도 했던 플랑시는 조선관 소개글을 쿠랑에게 쓰도록 했고 쿠랑은 당시 플랑시의 소장품이던 직지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인쇄본이라고 전시했지만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소장자인 플랑시에게 마저 직지는 가벼이 경매에 넘겨졌고 개인 구매자에 의해 훗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서 직지는 중국책으로 분류되어 겉장도 찢긴 채 방치되었다가 고서를 찾는데 전력을 다하던 박병선과1967년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었던 것이다. 직지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게된 프랑스는 방치했던 직지를 귀중본으로 분류해서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직지 반환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지만 박병선은 그 이상의 일을 해내었다. 최초로 직지를 알아보고 소장했던 첫 프랑스 공사 플랑시와 한국서지의 저자인 쿠랑 모두 꿈도 꾸지 못한 고증작업을 홀로 해서 직지가 1377년 청주의 흥덕사에서 인쇄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임을 세계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직지의 역사성’을 세계에 설득하지 못했던 쿠랑을 완전히 넘어선 것이다. 박병선은  약탈당한 의궤도 찾아내서 프랑스 정부와의 긴 고투 끝에 의궤를 안전하게 귀국시켰다. 박병선은 주체적이고 자긍심이 빛나는 모범적 인물이다. 더불어 고서에 흐르는 전류를 타고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은 경쟁과 ‘협업’(의도하지 않은)이 보여주는 성실한 학구적 정신도 함께 기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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