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불모지에 들어가 ‘그들’과 어울려야
지난 3월 이름도 화려한 ‘우먼드림플라자’ 개소식을 가졌던 삼성전자 수원 사업장. 여성인력에 대한 배려 때문일까? 제 위치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들이 속속 눈에 띈다는 소식에 대표주자로 꼽히는 프린팅 사업부 연구개발팀의 유승민(40) 수석연구원을 찾았다.
“연구소보다 현장감이 많아요. 재밌기도 해요. 연구소는 자기 맡은 일만 차분히 해나가면 되는데, 사업부는 재료가 쓰이는 제품 외에 여러 가지 생산품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에서부터 하드웨어, 메커니즘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 업무의 성격 상 대인관계나 커뮤니티, 네트워킹이 중시되고 일이 복합적으로 진행되죠.”
‘현장감이 재미있게 느껴진다’는 유승민 수석의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82학번으로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남편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93년 유학생활을 마칠 무렵 삼성종합기술원에 연구원으로 지원한다. 일리노이 대에서 화학으로 박사 후 과정을 마칠 무렵이었고, 임신을 한 탓에 입덧으로 애를 먹던 때였다.
내 전문분야를 넘어 선점하기
“보통 여자들이 애를 가지면 얘기 안 하고 싶어하는데 저는 지원을 할 때 ‘지금 임신을 했고 몇 개월이다. 삼성에 입사하면 애를 낳아야 되는데, 나는 산전휴가가 필요하다’ 그랬어요. 그렇게 메일을 보냈더니 저를 뽑는 실장님이 제 메일을 보고 세상에 이런 여자도 있다고, 얼마나 자신감 있으면 이렇겠냐, 일단 뽑고 보자. 일단 들어와라 한번 일하고 보자. 그래서 제가 뽑혔어요.”
지금은 웃으며 떠올리지만 시카고에서 뉴욕 삼성전자 본관까지 비행기에 오르기 전과 내리고 난 후 일단 화장실로 달려갈 만큼 힘들게 치른 면접이었다.
이후 귀국해서는? ‘서울대 갔겠다’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하고 돌아온 뒤, ‘고지식한’ 남편을 학교로 보내고 삼성에 입사한다.
‘짚신’ 신은 여자가
‘마라톤화’ 신은 남자 이기는법
‘그들’의 골인지점을 향해
꾸준히 나를 ‘접목’시키기
삼성종합기술원에서 사업부로 옮겨 온 것은 유승민 수석에게 좋은 기회였다. 올해 들어 마케팅 쪽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다양한 역할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자’는 유승민 수석의 주관 탓이다.
유승민 수석은 고객의 관점과 요구를 반영한 기술, 상품 가치가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상품화할 수 없는 기술은 반절밖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 지적한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상품을 얼마나 잘 설명하고 상품화하느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요즘은 마케팅 하는 사람이 기술을 모르면 약간 한계에 닿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기술을 아는 사람을 마케팅 쪽에서 영입하려고 하고, 반대로 마케팅 한 사람이 기술 쪽에 관심이 있으면 그렇게 갈 수도 있거든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놓고 그것과 약간 겹칠 수 있게 다른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상당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유승민 수석은 덧붙인다. 현재 마케팅에 자신은 있지만 좀더 구체화, 체계화시키는 부분을 학문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겠다 싶어 이것저것 고려 중이라 전한다.
마케팅 쪽으로 시야를 넓히는 유승민 수석의 사고는 입사 초부터 남달랐던 것 같다. 재료 쪽을 중시하는 반도체와 달리 수원 사업장은 백색가전 제품 위주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재료에 대한 중요도가 덜했고, 들어온 다음 비전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유승민 수석의 경우엔 어땠을까?
인정받고 있다는 뿌듯함이 힘
“순수 재료인 화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전자회사에 들어가길 꺼리거나 진로를 좁히지는 않았어요. ‘그들’ 세상에 내가 들어가 그들을 알고 나의 성격을 접목시킨 거죠. 그래야 그들도 이해를 하고 다음 후배들도 들어오는 것 같아요.” 전자 회사지만 재료에 대한 중요도가 부쩍 늘어난 지금 총괄계에서도 재료 연구를 강조할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었고, 유승민 수석이 몸담은 사업부에만도 재료 전공자는 30명에 이르게 되었다.
어떤 사회 혹은 조직이든 여성이 열세인 분야에 진출하고 싶다면 개척자의 자세로 들어가 ‘그들(남성 혹은 기득권자)과 어울려라.’ 유승민 수석의 성공전략이다.
삼성전자에 입사한 지 8년 째. 수석으로 진급한 데 대해 유승민 수석은 자신에 대한 역할을 명확히 규정해 주고 요건을 갖추어 준 상사에게 먼저 감사를 표한다.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주는 뿌듯함. 일을 할 수 있었고 수석으로 진급한 것 못지 않게 유승민 수석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부분이다.
“요즘은 여자가 올라갔다, 여자가 뭐가 됐다 그런 것이 얘기 대상이 안 돼요. 그게 너무 다행스러운 것 같아요.”
진급한 것보다 진급할 수 있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더 행복했다는 그녀. 남녀가 일하는 구조를 ‘마라톤화’를 신고 뛰는 남자와 ‘짚신’을 신고 뛰는 여자에 비유한다.
“만일 짚신을 신고 뛴다면 여자들이 좀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골인 지점까지는 들어가야 하니까. 들어가서 나한테 마라톤화가 있다면 더 잘 뛸 수 있을 거다 그러면 좀더 능동적이 되는 거죠.” 삼성전자 수원 사업장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부장급 위치에 오르게 된 유승민 수석. 이제 마라톤화로 갈아 신고 뛸 준비가 된 것은 아닐까. 그녀의 약진을 기대해 본다.
임인숙 기자isim123@wome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