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황유선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부사장
23일 회사가 코스닥 상장해 상한가 기록
ETRI 연구원서 벤처캐피털리스트로 변신
업계 남성들 대부분이라고
여성이 남성의 공식 따를 필요 없어
자기 만의 색깔을 만드는 것 중요
80살까지 같은 직종서 일하고 싶어

황유선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부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황유선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부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3일 황유선(51) 컴퍼니케이파트너스(이하 컴퍼니케이) 부사장은 이날 “컴퍼니케이가 코스닥에 상장됐다”며 활짝 웃었다.

“제가 투자한 회사 17개사를 상장시켰을 때는 조력자 입장이라 담담했거든요. 막상 당사자가 되니 기념식에서 울컥 하고 감동이 밀려오더라구요.”

최근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 벤처캐피털업체들이 상장을 몇 달씩 늦추는 상황에서 강행한 것이었는데 이날 주가가 상한가를 쳐 감동은 배가 됐다. 컴퍼니케이의 시초가는 공모가(4500원)보다 82.2% 높은 8200원으로 결정됐으며, 시초가 대비 2450원(29.88%) 오른 1만650원에 장을 마감했다. “저희 회사가 실적도 좋고 투명하게 잘 관리된 회사였기 때문에 코스닥 상장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장이 좋지 않아 주가는 예측 못 하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다른 회사가 철회한다고 저희도 중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스케줄대로 간다’고 결정했죠.”

컴퍼니케이는 지난해 매출 149억원, 영업이익 82억원, 당기순이익 62억원을 기록해 영업이익률이 55%에 달하고 있다.

그는 최근 여의도 자산운용사들을 대상으로 기업설명회를 40~50회 정도 진행했는데 하루에만 6~7곳씩 미팅을 했지만 그 과정이 즐겁기만 했다. “새로운 우군을 만든다고 생각하니 힘들다는 생각은 하나도 안 들었어요. 상장을 통해 계속 기업으로서의 토대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뭉클했어요.”

그는 고려대학교 산업공학과 학사를 거쳐 같은 학교, 같은 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공학박사이다. 박사를 마쳤을 때가 1998년이었는데 당시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로 취직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 때 대전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포닥(박사후) 과정으로 자리가 생겨 2000년까지 2년간 무선방송기술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정년이 보장된 삶이었음에도 저에게는 연구원의 삶이 너무 지루했어요. 그러던 중 2000년 삼성벤처투자에서 회사로 스카우트를 제안하는 전화가 걸려왔어요. 처음에는 제가 황유선이 맞는 지 몇 번 물어보더라구요.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더라구요. 이동통신 기술을 잘 아는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저는 주식이 뭔지도 모르고 돈에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어요.”

그의 거절에도 인사 담당자는 서울에 올 때 잠깐 들러보라고 권유해 날짜를 잡게 됐다. 그는 청바지에 배낭을 매고 평소 연구소 다니는 차림으로 삼성벤처투자를 방문했는데 그 날이 바로 엄숙한 분위기의 면접날이었던 것. 3~4명의 후보 중 그에게 “가장 좋은 점수로 합격을 했다”는 연락이 왔다. “왜 제가 높은 점수를 받았나 했는데 오히려 제가 업종을 모르니 좋았다는 거예요. 접대를 받거나 하는 비리는 없을 테니까요.”

전혀 다른 업무였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성격이라 재밌을 것 같다는 설레임이 더 컸다. 하지만 막상 회사에 입사했을 때 외계어 같은 말들이 오가다 보니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회계학을 공부하면서 업무에 적응할 수 있었다.

일 중독에 가까운 근성을 지닌 그는 벤처캐피털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다, 2005년 일산창업투자 상무로 자리를 옮겼고 NHN인베스트먼트 투자본부 이사를 거쳐 2014년부터 컴퍼니케이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일을 하면서 ‘언젠가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회사를 차리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회사를 직접 차리진 않았지만 일신창업투자 시절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던 김학범 대표가 컴퍼니케이를 창립했고, 같은 팀 멤버였던 이강수 부사장이 먼저 합류한 후 자신까지 합류해 팀 멤버들이 다 모였던 것. 그 때부터 각각의 색깔이 크게 다른 셋 간의 시너지가 커지면서 회사는 성장세를 거듭해왔다.

“저는 여자이지만 회사에서 아버지 담당이에요. 하하. 선이 굵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거든요. 이 부사장은 오히려 섬세해 어머니 담당이구요, 김 대표는 모든 것을 담고도 자리가 남는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죠.”

황유선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부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황유선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부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그는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일을 시작한 게 된 걸 행운으로 여긴다. 남들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부르짖지만 그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하다는 것. 남성들이 대다수인 벤터캐피털 업계에서 ICT(정보통신기술) 융합 분야의 여성 심사역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심사역은 섬세함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더 잘 할 수 있어요. 경영진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야 하고, 모든 의사결정을 혼자 해야 하는 벤처기업 경영자의 말을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는 남성들이 지배적인 영역이라고 해서 여성들이 그들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가면 견디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황유선 만의 스타일이 있는 데 김민수를 흉내 내면 결국 황유선도, 김민수도 아닌 게 되거든요. 그래서 저는 여성 심사역들에게 ‘너만의 색깔을 가지라’, ‘너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말해요.”

그는 올 연말에는 1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결성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투자 업체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상장했을 때 정말 큰 보람을 느껴요. 2005년 풀어야할 문제가 너무 많았던 한 회사를 알게 됐는데 경영진이 너무 훌륭했어요. 이 회사가 가슴에 깊이 남았고 다음해 이 회사를 위한 펀드를 만들었어요. 투자 후 이 회사 악성주주를 내보내는 작업을 하고 2010년 상장했는데 공모가의 2배가 되는 모습을 지켜봤을 때 정말 뿌듯했어요.”

그런 보람 때문에 그는 “80세까지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황유선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부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황유선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부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그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

남편이 포닥 과정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 있을 때는 그가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며 케어를 맡았다. 또 남편이 대전에서 교수로 자리를 잡았을 때는 아이들을 대전으로 내려 보내 아빠와 같이 생활하게 했고 온 가족은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이 고맙게도 아이들의 양육의 상당부분을 맡아주기도 했다.

“남편이 공부할 때는 제가 돈을 벌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했어요. 남편은 요리를 좋아해 주말에 요리를 자주 해요. 저희 집에서는 여자가 아이를 케어 해야 한다던가, 집안일을 해야 된다든가 하는 성별 구분이 없이 각자 자기 일을 하는데 그 점이 너무 좋은 것 같아요.”

결혼 후 매일 얼굴을 봤던 기간이 2년에 그쳤을 만큼 그와 남편은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지역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남편이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일하다 카이스트로 내려갈지 고민할 때도 “연구여건이 좋은 곳이라면 주저할 필요 없다”고 적극 권했을 정도이다.

그의 적극적인 의지로 그 흔한 사교육도 없이 자란 아들, 딸은 박사과정, 석·박사 과정을 스스로 선택해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 부부처럼 자신들이 행복한 일을 찾아 결정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자라난 게 지금은 너무 뿌듯하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도 행복하다는 것이죠. 저는 벤처캐피털리스트로 너무 행복하고 이를 지켜본 아이들도 행복하게 자라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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