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여성이 임신중단을 원하면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협박과 지원, 그리고 버려두기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낙태를 하면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국가가 필요하면 ‘인공임신중절’을 무료로 해주었다. 산업화 시대에 한국여성들은 (겉으로)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임신중단을 할 수 있었다. 원함 자체가 자발적이었다기보다 남아출생을 선호하는 가부장적 가족규범과 경제성장의 전제조건으로서 산아제한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가부장적 국가체제의 강요에 따른 비자발적 요소를 강하게 가졌음은 물론이다.

출생률을 떨어뜨린 인구정책의 성공을 자축하는 분위기 속에서 형법의 낙태 처벌도, 모자보건법의 인공임신중절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국가가 처벌로 지원도 하지 않고 관심을 거뒀던 그 사이에서 여성들이 기댈 수 있었던 곳은 산부인과 밖에 없었다. 종교공동체는 이미 그 안에서 인공임신중절 시술대에 올랐을 여성들의 모습을 외면한 채 태아의 생명권만 공허하게 외쳐댔다. 가족은 혼전임신을 한 딸은 숨기기에 전전긍긍했다. 남편들은 제대로 관리 못하고 무슨 임신이냐는 핀잔만 주었다. 그리고 네가 알아서 해라는 무언의 메시지만 전할 뿐이었다. 결국 아이를 낳을 경우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긴 채 학교에서 쫓겨나고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하며 인생에서 미래라는 단어가 사라질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여성 혼자의 것이었다.

말을 걸어봤자 소용없을 종교공동체, 학교, 가족과 이웃, 그리고 직장을 제외하고 보니 여성들에게는 산부인과 의원만 남았다. 각종 상담소, 센터, 복지관 등이 생겨났지만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갈 곳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율적 결정권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게다가 초저출산 현상을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에서 이명박 정권은 낙태 처벌 카드를 꺼내들고 나왔다. 인공임신중절을 지원하던 모습에서 낙태를 처벌하려는 안면몰수를 한 것이다. 결국 여성의 몸을 통제와 관리 대상으로만 여기는 국가의 모습이 다른 양상으로 드러났던 셈이다. 반면 여성운동은 지금까지 출산주체로서 여성의 지위를 쟁취하기 위하여 초지일관 투쟁하였다. 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 판결은 우연이 아니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새로운 과제 앞에 서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출산주체로서 여성을 인정하는 것인지 구체적인 방안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까지 유일한 말상대였던 산부인과 의원에서 여성이 출산주체로서 인정받았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군말없이 시술을 해주었다고 해서 여성이 출산주체로서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을까? 결국 여성이 ‘원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해진다. 임신중단이나 출산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상담 의무화 여부 논쟁과 관계없이, 신상정보 노출에 대한 불안 없이 필요할 때 여성과 배우자가 찾아갈 수 있는 무료·공공 상담소가 접근성 높게 촘촘히 생겨야 한다.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관에 치우쳐서 출산 혹은 임신중단을 유도하는 편향적 상담을 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임신중단과 관련한 보건의료·사회·법적 서비스를 충분하게 상담 과정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출산을 결심한다면 받을 수 있는 소득·주거·의료·교육 등 관련 서비스 정보도 함께 제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 확대 자체가 필수불가결하다.

출산주체로서 여성의 모습은 법적 기회만 보장한다고 형성될 수 없다. 자기결정권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조건과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4·11 헌법 불합치 판결의 의미를 살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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