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chinko』(파친코) 이민진 지음, Grand Central Publishing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한국전쟁,
분단 등 격동의 한국 근대사 배경
자이니치, ‘위안부’ 피해자 등
기록되지 못한 역사
소설로 세계에 알려

『파친코』 영문판 표지.
『파친코』 영문판 표지.

 

해외에 나가면 반드시 들르는 곳 중 하나가 동네 서점이다. 신간서적을 만나는 설렘과 함께 마치 보물창고를 들여다보듯 지역의 이야기와 숨결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뉴욕에 연구교수로 나와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전에도 즐겨 찾던 유대인이 운영하는 맨해튼 외곽의 작은 서점이었다. 서점을 들어서자 낯익은 점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 진열대 위에 전시돼있던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책표지에 한복을 입은 여인 그리고 여인의 치마폭에 한국의 정겨운 산천이 그려져 있는, 『PACHINKO』(파친코)라는 책이었다. 재미교포 작가의 소설 『파친코』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화제이며 특히 대학가와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작년에 지인을 통해 듣고 진즉에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책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책의 표지와 소설 시작 전 몇 페이지에 걸쳐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주노 디아스(Junot Diaz)를 비롯한 유명 작가, 권위 있는 신문사, 비평지 등에서 내놓은 『파친코』의 높은 작품성에 대한 호평이 실려 있었다. 또한 전미 도서상 최종 후보작,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워싱턴포스트, 영국 BBC, USA투데이 올해의 책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 책의 첫 문장이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톨스토이의 『부활』, 디킨스의 『두 도시이야기』, 멜빌의 『모비딕』의 첫 문장들이 각 작품 전체를 대변하듯 울림과 흡입력이 있었다.

『파친코』는 1910년부터 1989년까지 일제강점기, 광복, 한국전쟁, 분단 등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4대에 걸친 재일교포 가족의 처절한 삶을 작가의 날카로우면서도 사실적인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1989년 이민진 작가가 예일대 3학년 시절 일본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선교사의 강연을 통해 ‘자이니치’(zainichi,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를 일컫는 말로 ’일본에 사는 외국인‘을 뜻하며 영원한 이방인을 상징)가 겪는 멸시와 차별의 삶을 처음 접한다. 이 강연 내용에서 이야기 구상을 시작한 이 소설은 탈고하기까지 거의 3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 설정을 위해 부산, 일본 등에서 실존 인물들을 다양한 각도로 인터뷰하며 긴 연구와 조사과정을 거친다. 섬세하고 간결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필체를 통해 가난과 전쟁을 피해 건너간 일본에서 고향을 잃고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자이니치‘들의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빠져들게 한다.

이 책의 제목인 ‘파친코’는 책속에서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이라는 은유적 의미로 투영되고 있다. 동시에 일본의 제도적, 사회적 차별과 억압 속에서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없어 가난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파친코 사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자이니치(재일교포)의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파친코』의 주인공을 한명으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부산 영도에서 가난한 집 딸 ‘양진’이 언청이에 절름발이인 ‘훈이’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 ‘선자’의 이야기가 소설의 중심이 되고 있다. 선자는 16살에 유부남이며 야쿠자인 한수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그녀를 돕기 위해 결혼한 목사 이삭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노아와 모자수, 두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이야기는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까지 이어진다. 선자의 손자인 ‘솔로몬’이 14살 생일날 요코하마 지방관청에 외국인 등록증을 받으러 가서 열 손가락 지문을 찍는 이야기는 일본에서 태어나 2세, 3세, 4세가 되어도 3년에 한 번씩 지문 찍는 등록절차를 거쳐야 하는 재일교포들의 영원한 이방인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솔로몬의 아버지 모자수가 “솔로몬은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우리는 추방당할 수 있으니까. 우리에게는 조국이 없어. 인생이란 저 아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니까.” 라고 하는 말 속에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하는 파친코 같은 자이니치의 애환이 함축되어 있다.

일본에서 선자는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르다 세상을 떠난 남편 이삭을 대신해 가난과 차별 속에서 어린 두 아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삶에 대항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그녀가 어린 시절 부산에서 시장 아주머니로부터 들은 “여자의 삶은 일이 끊이지 않는 고통스러운 삶, 고통스럽고 또 고통스러운게 여자의 일생”이란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듯하다. 소설 속에 잠깐이지만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인 ‘덕희’(Dokhee, 한국어 번역판에 동희로 번역됨)와 ‘복희’ 자매는 선자의 어머니 양진의 하숙집 하녀였다. 그러나 중국에 취직시켜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서울에서 온 여자를 따라 떠난 후 연락이 끊긴다. 양진이 “시장에서 들은 얘긴데 공장으로 일하러 간 여자애들이 어딘가로 끌려가 일본 군인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다” 고 하는 말을 통해 위안부로 끌려가 생사조사 알 수 없는 소녀들의 삶이 암시된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요즘 역사 속에서 빛나는 독립운동가와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재조명되고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는 기념사업과 행사가 이어지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한편 한 재미교포 작가를 통해 일제강점기를 견디고 살아간 그동안 역사 속에서 묻혀 버리고 기록되지 않았던 자이니치 이야기, 위안부 이야기 등이 소설 속 인물로 되살아나 전 세계 독자들에 알려지는 일 또한 때로는 어떤 정치적 공방보다 강력하고 파급적일 수 있다. 얼마 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파친코』를 추천하면서 “전쟁 중 일본으로 이민 간 한국인들의 역사 소설”이며 “회복과 연민을 다룬 강력한 소설”이라 극찬했다.

『파친코』는 이제 곧 애플에 의해 8부작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자이니치, 위안부를 비롯해 한·일 간에 아직도 풀지 못한 이야기들이 이제는 미국 현지에서 방송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전해지게 될 것이다. 오늘도 동네 서점 베스트셀러 진열대 위에는 『파친코』가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앞으로 이 자리가 제2, 제3의 『파친코』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 한국에도 『파친코』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이미정 옮김·문학사상)

장윤금 숙명여자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장윤금 숙명여자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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