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서 내 자리는 남성 연장자 옆
“미투, 돈 노린 것 같다”는 말에 무기력

페미니스트들, 변치 않는 현실에 좌절
그래도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나 요새 지쳐”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없는 일에 분노하는 게 지치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내일이 올 것이라는 확신에 지치고, 이런 것들에 절망하는 나한테도 지쳐. 그래서 요새는 뉴스도 안 봐.” 그녀는 그 시간에 운동을 한다고 했다. 맛있는 커피를 찾아다니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만난단다. 소박한 행복에 위로받는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지친다고.

얼마 전 희한한 일을 겪었다. 장소를 두 번 옮겨 가며 진행된 업무 회식 자리에서 나의 자리는 계속 남성 최연장자 바로 옆자리로 정해졌다. 내가 골라서 앉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의 자리는 그 곳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제 뭐지 하는 맘이 들었지만, 2차 장소에서도 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젊은 여자를 남성 연장자 옆에 앉히는 강간문화군’ 싶었다. 혹여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정확하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쯤이었다. 이야기 주제로 ‘한국 미투운동’이 올라왔다. “돈을 노리고 증언한 것 같아”, “그 여자는 가해자와 연인 사이였던 것 같은데 말이야”. 젊은 남성, 이모뻘 여성들이 편하게 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쓰렸다.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내놓았지만 결국 말하기를 그만 두었다. 내가 어디까지 어떤 태도로 이야기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들에겐 ‘악의’가 없었다. 악의 없는 말들이 얼마나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집에 돌아와 잠들 때까지 묵직한 돌 하나가 목구멍을 막고 있는 듯했다.

며칠 내내 그날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현장에서 나의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침묵과 설득. 한번은 몰라서 못했고 한번은 시도해보긴 했다. 머리 속에서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는데 정답을 구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내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앞으로 젊은 여성을 남성 연장자 옆에 앉히는 일을 멈추고, 미투운동 피해자에게 공감과 지지의 마음을 가지고 일상에서 실천케 하는 이상적 결말은 나만의 환상에 가까운 듯 했다.

페미니스트들은 매일 좌절할 거다.

공중화장실 벽에 뚫린 구멍을 누군가 막아 놓은 것을 보며. 페미니즘은 정신병 아니냐는 온라인 커뮤니티 댓글을 보며. 서울교대 남학생들이 성희롱적 발언을 일삼는 것을 보며. 안희정 사건 불륜 아니냐고 묻는 선배를 보며. 어제 그때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 나를 떠올리보며.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의 싸움은 그곳에만 있지 않다. 형법상 자기낙태죄의 헌법 불합치 판결은 나의 재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판결로 나의 일상은 곧 바뀔 것이다. 2019년에도 개인의 일상과는 사뭇 떨어져있지만 한국 사회를 뒤흔들 역사적 변곡점이 될 수 있는 사건들이 있다. 김학의, 승리-버닝썬 그리고 장자연. 사건이 제대로 풀린다면 가부장제의 공고한 벽에 타격이 된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올해는 나혜석 탄생 123주년이 되는 해다. 나혜석은 90여년 전 쓴 이혼고백서에 이렇게 썼다.

“나는 거의 다시 일어설 기분이 없을 만큼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같은 운명의 줄에 얽혀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1세기 전 척박한 조선의 상황에서 여성도 인간이라고 외친 그녀는 남편과 가족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았다.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5천년을 내려져온 가부장제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인류 역사 5천년을 다시 한번 써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난 수백 년 간 여성운동에 헌신한 이들, 지금 페미니즘 운동을 계속 해오는 많은 이들도 비슷한 마음이겠지. 그게 내 일상의 승리는 아닐지라도, 내일 당장이 아닐지라도.

그런데 말이 이렇지, 지치면 쉬는 게 최고다.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당 공동운영위원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신지예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이정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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