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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렬쇼였던가. 세대간의 차이를 재치 있게 비교해보는 코너가 있었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볼 때 10대는 컴퓨터에서 무삭제판으로 보고, 20대는 영화관에서, 30대는 비디오로, 40대는 명절 때 TV에서 방영하는 특선영화로 본다는 것. 또 언젠가는 새끼손가락의 용도에 관한 내용이 나왔는데, 10대는 여자친구를 지칭할 때, 20대는 애인과 결혼을 약속할 때 새끼손가락을 사용한다나. 30대는 정확하진 않지만 코 후빌 때였던 것 같다. 그러면 40대의 새끼손가락 용도는 뭐였는지 아는가? 보약 저을 때.

내가 이런 얘기를 해주면 친구들은 “그래 그래, 꼭 맞어” 하며 깔깔대며 웃는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아는 K선생님은 67살이시지만, 보고 싶은 영화는 꼭 기억해 놓았다가 개봉하는 날 보신다. 그리고는 “그 로만 폴란스키 감독 말이야. 여간 만만치가 않단 말이야…” 하며 영화평도 빼놓지 않고, 또 어떤 영화는 꼭 보라며 권하기도 하신다.

새끼손가락만 해도 그렇지. 70대의 노인이라도 배우자와 손가락을 걸며 무언가를 약속할 수도 있고, 또 배우자와 사별한 후에 다른 이성과 새끼손가락을 걸며 사랑을 약속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40대부터 노인 취급을 하다니, 50대 이상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연령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매스컴에서는 얼마나 더 심각하고도 직접적인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일 뿐이다. TV에서 나이든 사람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은 많지 않다. 주요 출연자의 평균연령은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여서 그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웃음의 내용을 이해하기란 중년인 나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TV는 활동적인 생활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노인들에게는 마지막 의지처와도 같다. 실제로 우리나라 노인들에게 TV는 여가생활의 중요한 수단이다. 전국의 노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노인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여가활동은 TV 시청 및 라디오 청취로서 약 95%의 노인이 이에 해당되었고, 그 다음이 친구나 친척들과 하는 장기, 바둑, 화투놀이, 그리고 산책, 여행, 정원 가꾸기 정도였다.

그러니 TV가 노인의 여가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마도 청소년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을 것이다. 나는 몸이 아프거나 거동이 불편하여 외출조차 할 수 없는 노인들이 하루 종일 TV를 보며 기나긴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 위력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TV 프로그램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또 TV에 출연하는 중년들이 조연에 머문다면, 어쩌다 출연하는 노인들은 대부분 주책 맞거나 우스꽝스럽고 변덕스러운 엑스트라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본다. 나는 이산가족의 만남이 중계될 때마다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우리 역사의 주연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곤 한다.

노인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 나는 거대한 이산가족 만남의 드라마에 나타난 노인들을 관찰하면서 우리 국민의 평균수명이 길어졌다는 것도 확인하고, 남한을 방문한 북한 사람들은 부모를 만나는 경우가 많지만 북한을 방문한 남한 사람들은 부모를 만나지 못하는 비율이 더 높은 것으로 보아 북한의 노인들이 남한의 노인보다 빨리 돌아가신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또 노인들의 건강상태나 생활양식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모습들도 유심히 살펴본다.

그러나 평균수명이나 건강상태 같은 것은 보다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만드는 ‘그림’과 ‘느낌’이다. 나는 이산가족의 만남을 볼 때마다 노인들에게서 결코 만만치 않은 어떤 ‘힘’과 ‘가능성’을 분명히 느낀다.

즉 이들, 노인들이야말로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도 우리를 받쳐주기 위해 커다란 그물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것은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는 부실과 만연된 부패와 부정, 이기적 집단주의 속에서도 우리 사회가 살아남고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50년 전에 자전거를 사러 간다고 나간 후 행방불명된 아들에게 “그래 자전거는 샀니?” 하고 묻는 팔순 어머니의 강인함과 의연함을 보노라면, 이 어머니들이야말로 명절이면 20시간을 들이면서도 달려가게 하는 ‘성지순례’의 대상자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앞으로 우리 국민의 평균연령은 점점 높아지며, 노인인구는 더욱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 아마도 TV를 비롯한 매스컴은 점점 더 나이든 사람들에게 구애의 손짓을 보낼 것이다.

그 뿐인가. 교육수준이 높은 노인들도 많아지고 있다. 아니 교육의 힘이 아니더라도, 나는 노인들의 건전한 상식과 문화적 잠재력을 믿는다. 최근에 건강하고 씩씩한 아줌마들이 대안문화를 찾으려고 바삐 움직이는 것처럼, 앞으로 노인들도 얼마든지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TV 프로그램에도 훨씬 더 다양한 연령층의 욕구를 겨냥하는 재미있고 유익한 프로그램이 생겨날 것이다. 더 나아가 세대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조정하는 건강한 프로그램도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나이든 사람들이여. 마음에 안 드는 TV 프로그램이라도 열심히 보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익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작정 채널을 돌릴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문화의 진상을 직접 느껴보시라.

물론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중문화를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안목도 동시에 가져보자. 그리고 재미없는 것은 재미없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정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없으면 TV 안보기 운동이라도 벌일 일이다. 나이든 사람들의 힘은 정치적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인의 힘은 문화를 바꾸고, 또 새로 만드는 데에도 존재한다.

한혜경/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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