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곳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가에는 ‘미국 상원조차 할리우드보다 진보적이다: 여성 상원의원 14%, 여성감독 4%’라고 쓴 빌보드가 한달 동안 서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모았다. 할리우드가 얼마나 남성, 특히 백인남성 위주인가를 비판하는 이 빌보드는 미국내 여성 예술가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페미니스트 그룹인 게릴라 걸스(Guerilla Girls)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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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 걸스가 상원과 할리우드를 내세운 것은 두 조직이 모두 여성과 유색인종의 고용률에 있어서 미국 평균치를 크게 밑돌기 때문이다. 상원에 여성의원이 14%라는 것은 사상 최대의 수치이긴 하지만 50%의 여성유권자를 대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2002년 톱 영화 100편 중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는 4%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게릴라 걸스는 샌디에고 주립대학의 마사 로젠 교수가 매년 발표하는 통계를 바탕으로 할리우드가 얼마나 여성들에게 배타적인지를 보여준다. 100편 중 여성감독이 만든 작품은 4%, 여성 시나리오작가가 참여한 작품은 8%에 그쳤고, 여성 촬영감독을 고용한 영화는 1%에 지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많이 참여해온 편집분야 역시 12%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데 머물렀다. 게릴라 걸스는 이 같은 사실을 고발하면서 할리우드가 여성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때가 왔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최근 들어 여성감독들이 만든 작품이 꽤 개봉되긴 하지만 할리우드의 주류라 할 수 있는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작품은 거의 없다. 여성감독들은 대부분 선댄스 영화제 등 독립영화계에서 먼저 데뷔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나마 스튜디오 대작의 감독직을 제의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요즘 가장 주가가 높은 여성감독은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로 대박을 터뜨렸던 낸시 메이어스. 메이어스는 그 성공을 바탕으로 현재 잭 니컬슨과 다이앤 키튼 주연의 또 다른 코미디를 만들고 있는데 감독으로 고용되기 전 주연을 맡은 잭 니컬슨의 재가를 얻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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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이 넘는 연기생활을 한 베테랑 배우 니컬슨이 지금까지 한번도 여성감독과 일해본 적이 없는 데다 할리우드 영화는 스타들이 좌우하기 때문에 니컬슨이 같이 일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스튜디오 측이 감독을 바꿀 공산이 큰 게 현실. 게다가 대부분의 남자배우들은 좀더 권위감이 있는 남자감독들과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할리우드의 여성감독 수는 21세기 들어서면서 오히려 더더욱 감소하는 추세다. 1991년만 해도 여성감독들의 진출이 두드러져 타임지가 ‘여성감독들이 만든 주류 영화 러시’란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쓰기까지 했다. 당시 거론된 여성감독들은 마사 쿨리지, 랜다 헤인즈, 조디 포스터, 바바라 스트라이샌드, 메리 램버트, 에이미 헥커링, 페니 마셜, 조안 실버 등등. 하지만 거론된 감독 중 현재 할리우드에서 투자가치가 있는 A급 스튜디오감독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캐슬린 비글로와 노라 에프론 두 명 정도다.

스튜디오들이 그동안 만든 여성감독들의 영화를 살펴보면 할리우드가 얼마나 남자들만의 세계인지를 알 수 있다. 유니버설은 2001년 이후 단 한 편의 여성감독 영화를 개봉했는데, 최근 인도 볼리우드와 할리우드를 결합했다고 해서 화제를 모은 코미디 ‘구루’를 만든 데이지 폰 쉘러 메이어의 작품이다.

20세기 폭스는 곧 린다 멘도자 감독의 저예산 영화 <체이싱 파피>를 개봉 예정인데 4년만에 처음 만든 여성감독 영화다. 창립 7년 동안 드림웍스는 <슈렉>을 포함, 여러 편의 애니메이션을 여성들이 공동연출했지만 실사영화 부문에는 99년 이후 한 명도 없다.

스튜디오들의 여성감독 영화의 감소는 스튜디오 경영에 여성 간부들이 많이 진출한 것과 반비례한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현재 5개의 메이저 스튜디오의 제작 결정권자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를 감독으로 고용하는가를 살펴보면 남자들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을 때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감독들이 귀한 것은 스튜디오가 일부러 여성들을 차별한다기 보다는 스튜디오가 갈수록 흥행에만 매달린다는 점과 더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여성 스튜디오 간부들이 여러 차례 여성감독을 고용했지만 흥행면에선 실패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젠 스튜디오 영화 한 편의 제작비가 6천만 달러를 육박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제작간부들은 흥행성이 보장된 감독 이외의 다른 감독에 모험을 거는 일을 점점 더 꺼리고 있다. 더군다나 지난 10년 간 할리우드는 성인드라마보다는 액션 스릴러, 10대 코미디나 만화영화를 각색한 프랜차이즈 영화에 몰두해와 더더욱 여성감독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92년 이후 여성감독이 연출 혹은 공동연출을 맡은 작품들이 벌어들인 총 액수는 6천만 달러 이상이지만 이중 액션영화는 미미 레더스의 <딥 임팩트> 한 편 뿐이었다.

콜럼비아 영화사의 회장인 에이미 파스칼은 최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소피아 코폴라와 킴벌리 피어스 등 뛰어난 여성감독들을 고용하고 싶지만 우리 회사는 <맨 인 블랙2>와 아담 샌들러 영화를 만들기 때문에 여성감독들이 좋아하는 소재를 제공해줄 수가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할리우드 영화가 점점 더 남성적, 특히 10대 남자 청소년들을 주 타깃으로 하면서 여성감독들이 그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남/ 재미 영화평론가, USC영화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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