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오페라단의 신작 ‘베르테르’ 리뷰

 

샤를로트와의 사랑이 끝내 이뤄지지 않자 절망한 베르테르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샤를로트가 도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서울시오페라단의 신작 ‘베르테르’(5월 1~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는 이런 물음에 대해 같은 제목의 여느 오페라와는 아주 다른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큰 틀에서의 이야기는 같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샤를로트가 드러내는 심리와 행동은 판이하다. 그간의 뜨거운 열정은 3월의 눈 녹은 듯 사라지고, 얼음 같은 차가움으로 변한다. 쓰러진 베르테르를 싸늘한 시선으로 일별한 후 매몰차게 가정으로 복귀하는 여인의 이미지다.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며 냉정한 현대여성의 면모를 보인다. 김광보 연출이 도출해낸 샤를로트의 성격 분석은 거의 도발 수준이었다.

서울시오페라단의 ‘베르테르’ 중 한 장면 ⓒ강일중
서울시오페라단의 ‘베르테르’ 중 한 장면 ⓒ강일중

음악(지휘 양진모 / 음악코치 정호정) 또한 그런 작품 해석과 절묘한 합을 이루면서 격정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실어냈다. 주요 출연진의 노래와 연기 역시 그에 맞춰 각 인물의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켰다.

샤를로트에 대한 남다른 해석의 징후는 초기장면에서 감지됐다. 괴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쥘 마스네의 오페라 ‘베르테르’는 보통의 경우 베르테르가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있는 순결한 모습의 샤를로트를 먼저 보고 첫눈에 반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번 신작은 샤를로트가 무대 왼쪽 뒤에서 자신의 집에 온 베르테르를 뭔가를 갈망하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유심히 살피고 있다는 점이 색다르다. 관심과 욕망이 샤를로트로부터 싹텄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후의 무대에서도 샤를로트가 베르테르의 구애에 크게 흔들리다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서는 대목이 여럿 있다. 베르테르의 사랑을 거부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되돌아와 갈망의 몸짓을 하다 다시 떠나는 장면도 두 번(1막, 3막)이나 있다. 샤를로트의 불확실한 태도에 베르테르의 좌절감은 더욱 깊어진다.

서울시오페라단의 ‘베르테르’ 중 한 장면 ⓒ강일중
서울시오페라단의 ‘베르테르’ 중 한 장면 ⓒ강일중

마무리에서 샤를로트의 내면 심리는 분명히 드러난다. 베르테르의 죽음 앞에서 절규하던 샤를로트는 아이들의 성탄절 노랫소리가 들리자 냉담하게 훌훌 털고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샤를로트가 갑자기 되돌아서 차갑게 베르테르의 주검을 보는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에 이미 익숙한 관객에게는 일종의 반전이다. 샤를로트의 마음은 이미 집으로 향하고 있다.

이에 앞서 “봄의 숨결이여 왜 나를 깨우는가?”로 시작되는 베르테르의 ‘오시안의 노래’ 아리아를 비롯해 샤를로트의 ‘편지의 아리아’가 있는 3막은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단계다. 이 부분에서 베르테르 역의 테너 신상근과 샤를로트 역 메조소프라노 김정미의 열창과 열연은 두 남녀의 비극적 사랑과 아픔을 오롯이 감동적으로 전달했다. 두 사람은 모두 "이제 오페라 가수가 노래만 잘 부르는 시대는 갔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할 정도로 무대에서 좋은 연기력을 보였다. 오페라 ‘베르테르’에서는 비중이 꽤 큰 소피(샤를로트의 동생) 역의 소프라노 김샤론도 노래와 몸짓 연기 등 여러 면에서 돋보였다. 주요 역들은 이번에 모두 더블캐스팅됐다.

때로는 ‘질풍노도’와 같은 몸짓의 양진모가 지휘하는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70인의 연주자가 투입된 대규모 편성을 통해 무결의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의 노래와 연기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서울시오페라단의 ‘베르테르’ 중 한 장면 ⓒ강일중
서울시오페라단의 ‘베르테르’ 중 한 장면 ⓒ강일중

서울시오페라단(단장 이경재)의 ‘베르테르’는 동아연극상의 연출상을 비롯해 연극계의 많은 상을 받은 김광보 서울시극단 단장이 연출한 첫 오페라다. 그만큼 연극적인 요소가 오페라의 세밀한 부분에서 많이 반영됐다. 실제로 배경을 구성하는 장면에 배우들도 많이 출연한다.

음악만 흐르는 장면에서도 작품이 갖는 의미를 드러내는 움직임이나 음미해볼 만한 시각 이미지를 촘촘하게 채워 넣은 것이 큰 특징이었다. 극중 다양한 공간을 표현한 4각의 투명 아크릴 박스 공간이나 만개한 꽃과 녹음의 7월, 단풍의 10월, 눈 내리는 12월 등 계절의 변화를 표현한 망사막의 영상 이미지, 회전무대 등도 관객의 시선을 끌어들이는데 큰 몫을 했다. 거의 빈 미니멀한 무대 중앙에 긴 벤치 하나를 놓고 베르테르의 죽음의 공간을 표현한 마지막 4막의 무대 연출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강일중 공연 칼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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