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애·김규식 부부 독립지사/ 보훈처 제공
김순애·김규식 부부 독립지사/ 보훈처 제공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김규식·김순애 선생 부부를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김순애 선생(1889.5~1976.5)은 1909년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역사와 지리를 몰래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깨우치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힐 위기에 놓이자 1911년 만주로 망명해 김규식 선생과 결혼했다. 선생은 1919년 7월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상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 독립운동을 펼쳤다.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1926년 7월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참여해 재정 지원 활동을 했다. 간호원양성소를 세워 다수의 간호원을 양성하고 배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30년 8월 상해에서 김윤경·박영봉·연충효 등과 함께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해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43년 2월 중국 충칭에서 부인 50여명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열고, 조직 재출범과 함께 주석으로 추대됐다.

광복 후 선생은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역임하며 여성교육에 힘썼다. 1976년 5월17일 8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김규식 선생(1881.1~1950.12)은 1897년 미국 유학을 떠나 로아노크대학을 거쳐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았다.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여러 강연을 통한 구국운동을 펼쳤다. 1913년 중국 상해로 망명,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을 설립해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5월12일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를 제출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과 외무위원을 맡았다.

1933년 미국을 방문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을 전개하고, 수천달러를 모금해 돌아왔다.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됐고, 1944년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 부주석 체제의 양대 정당이 중심이 됐다.

선생은 1950년 북한군에 납치돼 그 해 12월10일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정부는 김순애 선생에게는 1977년 독립장을, 김규식 선생에게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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