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지어! 속박인가 해방인가

본인은 중학교 1학년 말 때부터 브래지어를 차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가슴이 커서 뛰어다닐 때 덜렁덜렁 신경이 쓰이는 것도 아니었고, 그 때까지만 해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친구들이 반에서 꽤 되었기 때문에 굳이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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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새로 오신 가사 선생님이 “단정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브래지어를 착용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시며 단호한 표정으로 ‘전교 여학생 브래지어 입히기’ 프로젝트를 단행하시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작은 가슴 위에서 휙휙 겉도는 브래지어를 차는 것으로 ‘단정한 여성’이 되었고 ‘조금 답답하고 불편하더라도 남들도 다 하는 거니까 당연히 해야지’하며 한 번도 브래지어를 차는 것에 대해서 반감이나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브래지어를 벗고 자는 것이 편하다 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다. 워낙 게으른 구석이 있어서 항상 관성에 휘둘리며 살다보니 브래지어를 벗고 잘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브래지어 호크를 하나 푸는 것으로 얼마만큼의 편안함을 맛볼 수 있는지 알고 나서야 비로소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 했던가. 깨닫지 못 하는 사이에 나는 내 자신의 몸을 얼마나 혹사시키고 사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브래지어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는 조금씩 바뀌어 갔다.

일전에 팍시러브넷 주최로 스무 명 남짓한 여성 회원들이 모여 유방 워크숍을 한 적이 있다. 유방암에 관한 여러가지 궁금증이 해소되고 나자 대부분 여성들의 이야기 소재는 사이즈에 관한 것으로 옮아갔다. 나는 내 가슴이 작다고 생각되는 사람 측에 속했기 때문에 큰 가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것을 요지로 하는 불만 사항을 줄줄 풀어놓았는데,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은 생각보다 큰 가슴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볼륨업 브라 열풍이 일고 있는 이 때에 큰 가슴이 콤플렉스라니? 유방 확대 수술에까지 은근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본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들의 고민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유방이 큰 여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그리 곱지 많은 않다”는 것과 “생활하는 데 실제적인 불편함이 있다”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불만의 요지였다.

‘아니, 나는 오히려 가슴 작은 여자가 괄시(?) 받는 사회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큰 가슴(?)도 괄시를 받는단 말이야?’ 하긴 내 가슴이 작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아스팔트 위의 껌딱지’ ‘계란후라이’ 등의 작은 가슴 비하 발언만 거슬렸던 것이리라. 큰 여자들 입장에서는 ‘가슴 큰 여자는 머리가 나쁘다’는 류의 속설이 얼마나 거슬리고 기분 나빴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억울해졌다.

크면 크다고 뭐라고 하고 작으면 작다고 뭐라고 하고, 적당하다는 기준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가슴 사이즈를 맞추란 말이냐. 이 질문에 우리 남편은 ‘나만 좋으면 되지!’라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고 나는 그러면서 가슴 큰 여자는 왜 침 흘리면서 쳐다봐! 라고 꽥 고함을 질렀다.

남성들의 시각을 중심에 놓고 나의 아름다움이나 정체성에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이야기하면서도 나 또한 남들의 시각을(특히 남자들의 시각을) 의식하며 행동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최고로 이뻐’라고 말하면서도 시선은 쭉쭉빵빵 미녀들을 따라가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 열불이 치밀기도 하지만 그러한 액션이 의도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남편을 탓하기보단 쭉쭉빵빵 미녀들을 질투하는 것으로 대개의 삐짐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또, 예쁜 가슴과 예쁜 몸매의 여성들을 보면 그 곡선의 아름다움에 나 또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다. 다만, 아름다움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끝이 없는 집착을 부르고 그러한 집착은 콤플렉스를 낳기에…. 그리고 그러한 콤플렉스는 ‘예쁜 것들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이나 ‘지나친 수술로 인한 부작용’의 양상으로 발전되는 경우를 초래하기도 하기에 어느 정도 경계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시 브래지어 이야기로 돌아가서 ‘정숙한 여자라면 당연히 입어야 하니 브래지어를 입는다’는 생각에서 ‘벗고 싶을 때는 편하게 벗고 입고 싶을 때는 입는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고 나니 나에게 있어서 브래지어는 더 이상 속박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나를 더욱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이제 노브라로 꼭지만 가리고 싶을 때는 꼭지 부분만 살짝 덮어주는 패드를 쓰고, 볼륨을 높여 깊게 파진 섹시한 원피스 사이로 젖무덤이 보이게 하고 싶을 때는 뽕브라를 사용한다. 그리고 편안하게 쉬고 싶을 때에는 아예 브라를 벗어 던지기도 하고 말이다.

60년대 미국에서 브래지어 태우기 운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도 기회가 되면 ‘노브라 운동’을 시행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지 “노브라여야만 당당한 여성이다”라는 식의 주장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래로 쳐져서 출렁이거나 빈약해 보이는 가슴이 오히려 더 신경 쓰일 것이 뻔하고 그러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애써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또 하나의 억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브래지어를 벗자∼” 그것은 내 몸을 가두는 속박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내 가슴에게 말을 거는 행위를 뜻한다. 상황과 기분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착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브래지어는 더 이상 속박이 아닌 기분 좋은 액세서리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Foxylove.net 대장, 이연희

필자는 현재 국내 유일의 여성전용성인사이트 팍시러브를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 유방암 자가진단과 아름다운 유방 가꾸기를 내용으로 하는 제 1회 유방 워크숍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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