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보다 처참했던 삶, 원폭피해 한국여성들
죽음 보다 처참했던 삶, 원폭피해 한국여성들
  • 김서현 기자
  • 승인 2019.04.27 08:55
  • 수정 2019-04-24 2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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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
퇴임후 살러 간 경남 합천에서
‘잊혀진 피해자’들 만나
『원폭 피해 한국 여성들』 펴내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피해자복지회관서 82명 연구

남성 피폭자와는 또 다른 삶,
아기낳고 아프면 이혼 당해
지난 2월 ‘원폭 피해 한국 여성들’ 을 출간한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여성학자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2월 ‘원폭 피해 한국 여성들’ 을 출간한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여성학자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 원폭 피해 여성은 원폭 피해를 입은 순간 하천에 뛰어들며 꼭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살아났다고 했어요. 그런데 자신이 그때 죽었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처절한 순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살아났는데 그 이후 70여년의 삶이 더 비참하고 힘들었던 겁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삽시간에 도시가 불바다가 되고 사람들이 녹아내렸다. “마주보이는 하늘가에서 태양빛이 번쩍 갈라터지듯 흩어지는 불덩이를 봤다. 그 불덩이가 자신을 향해 달려든다고 생각했을 그 순간 정신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때 왼쪽 눈알이 튀어나가 버렸다”(김정순 증언, 98쪽, 원폭 피해 한국 여성들) 이때 20여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9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의 괴로움을 빨리 끝내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사용했다”고 연설했다.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원폭 피해 한국 여성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1945년 원폭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삶에 대해 조명한 책이다. 저자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는 5년 전 정년 퇴임하고 이듬해부터 경남 합천에서 살고 있다. 합천에는 전국 유일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1996년 문을 연 복지회관은 진료실과 생활실 등을 갖추고 총 101명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다. “하루는 보도를 보니 원폭 피해자 실태조사를 한다기에 내가 도와야겠다 싶어 관계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복지관이 합천에 유일하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태조사에는 참여 못했지만 그때부터 자료조사를 시작해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게됐다.”

김 전 교수는 복지회관을 중심으로 33명을 인터뷰하고 옛날 구술생애사 자료 49명을 포함해 총 82명의 생애를 모아 분석했다. 지금까지 한국 원폭 피해 여성들이 주목받지 못한 데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치료비, 장례비를 받는 자격을 얻는 것, 피폭자 건강수첩을 받는 것”에 초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여성들은 자신이 아팠던 이야기, 가족이 아팠던 이야기들에 대해 했으나 듣는 이들은 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성으로서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이 투하된 후 귀향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약 2만 3천 명으로 추정 된다. 같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지만 여성과 남성의 삶은 달랐다. 김 전 교수는 “결혼생활에서 달랐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결혼을 하지 않는 여성을 주변인으로 취급했다. 여성은 아내가 되어야만 유교의 윤리 체계 안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자기 존재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원폭 피해 여성들은 여기서 추방당했다”며 “아프고, 아이를 못 낳거나 아이가 아프면 이혼 당했다. 남성들도 그랬으나 여성들이 훨씬 더 심했다.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친정은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합천에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있는 것은 유독 합천 출신 피해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김 전 교수는 “합천은 가난한 동네였다. 한 사람이 가고, 너무 먹고 살기 힘드니 한 사람을 연고로 다들 히로시마로 따라갔다. 히로시마는 당시 군사도시로 토목사업 등 노동자를 많이 필요했다. 강제징용, 자발적인 이주, 히로시마에서의 출생 등 맥락도 다양하지만 주로 경제적 이유로 이주했다. 나가사키는 또 상황이 다르다. 나가사키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은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라고 설명했다.  

이주민 중심으로 꾸려졌던 일본에서의 삶은 한국에서의 삶과 달랐다. 일본에 있을 때는 핵가족 단위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전통 대가족 중심의 가부장제와는 달랐다. 생계 유지를 위해 꾸려진 가족 단위였기 때문에 처가 중심이어도 연줄만 되면 따라갔다. 김 전 교수는 “돌아올 때는 모두 시가로 돌아왔다. 다시 전통 가부장제로 복원됐다. 일본에서는 남성도 자식에 대한 애정표현도 적극적이고 여성 또한 교육시켰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그런 모습이 모두 사라진다”고 지적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와 일본에서의 삶이 남긴 흔적도 한국으로 돌아온 후의 삶을 힘들게 했다. “켈로이드라고 하는 겉으로 보이는 외상을 문둥병 환자라며 기피했다. 또 원폭 피해자 가운데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한국어를 잘 하지 못했다. 거기에 원폭 피해로 인해 이유도 모른 채 아파야만 했다.” 강제 징용으로 끌려 가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환전을 거치지 못 하는 등 재산조차 못 챙긴 원폭 피해자들은 가난까지 겪어야 했다. 가난은 조혼과 교육의 부재, 힘든 노동으로 이어졌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1968년 손귀달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치료전문병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밀항을 해 치료를 요구함으로써 물고를 트게 됐다. 일본 언론이 온정적인 보도를 했고 잠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밀입국으로 추방당했고 2년 후 오빠인 손진두가 다시 일본에 밀항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본시민단체의 조력을 받아 재판을 받아 치료와 수당을 받는 계기가 됐다. “이때 20대였던 이치바 준코가 일에 뛰어들게 되는데 70대가 된 지금까지도 한국을 오가며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김 전 교수는 연구를 하며 역사서가 객관화 돼 한 줄로만 남은 것들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조금 더 자세히 상황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증언한 여성들은 원폭 피해뿐 아니라 가부장제 속에서, 시대적인 아픔 속에서 너무나 고통 받았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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