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 폭로는
삶과 생존의 문제
자신의 피해 드러내고
해결 방식의 선택은
피해자에게 맡겨져야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성폭력․성희롱 피해자들이 용기가 없어서 신고를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피해자를 대신해서 목격자가 신고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든 거예요.” 지난 주 국회에서 있었던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예술인권리보장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문화예술계 성폭력·성희롱 ‘신고의무제’ 도입에 대해 ‘우리의 일상을 흔들 수 있다’는 필자의 우려에 대해 되돌아온 대답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접근의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이 선의가 가져올 결과가 두려울 뿐이다.

예술인권리보장법은 지난 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와 2018년 미투 운동 등을 계기로 “예술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예술인의 노동과 복지 등 직업적 권리를 신장하며, 예술인의 문화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지위를 보장하고 성평등한 예술환경을 조성하여 예술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구상된 법률이다. 오랜 논의 끝에 지난 4월 19일 발의됐다.

문화예술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성희롱은 발생 공간과 그 모습이 다양하다. 문화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남성 권력자 개인에 의한 다수 여성의 피해라는 특징이 있다. 문화예술계의 공급 과잉은 ‘침묵의 카르텔’을 강고하게 하여 피해자의 피해 드러내기 그 자체를 억압한다. 이로 인해 성차별적인 구조는 유지・강화된다. 문화예술 생태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문화예술계 특성을 고려한 성희롱‧성폭력 피해자 지원체계와 구제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법률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예술인권리보장법안은 ‘성평등한 예술환경 조성’을 법률의 목적에 포함시켰다. ‘예술인은 성평등한 예술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성희롱‧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또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로 예술인에 대한 ‘성희롱・성폭력을 금지‧예방하고 피해자의 보호와 권리구제를 위한 시책’을 마련하도록 하고 있는 점 등은 커다란 진전으로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이 법률안은 성폭력‧성희롱 사건의 제3자 신고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제3자 신고제도는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와 피해 목격자에게 동일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제3자에 의해 성폭력‧성희롱 사건의 신고와 사건의 해결방식이 선택될 수 있다.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피해가 가시화되고 사건의 공식적 해결이 시도될 수 있다. 이 방식은 피해를 드러내지 않기로 결정한 이에게는 폭력적일수 있다. 또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정쟁과 거래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현실에서 우리의 일상을 파괴할 위험성이 상존한다.

성폭력·성희롱 피해자가 그 피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길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또는 공동체에서 자신이 특정인으로부터 성폭력 또는 성희롱 피해를 당했다는 폭로는 용기 이전의 삶과 생존의 문제다. 피해를 드러내고 사건화 하는 것은 피해자에게는 많은 시간과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다. 피해사실을 드러내고 사건의 공식적 해결을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사유과정이 필요하다. 피해를 드러내고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선택은 피해자에게 맡겨져야 한다. 피해자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고 사건의 공식적인 해결을 결심했을 때 그 길을 함께 할 수는 있어도 어느 누구도 그녀가 원치 않는데 해결을 대신해줄 수 없다.

더욱 이 제도가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피해)와 만나게 되면 정작 가해자는 사라지고 모두가 가해자가 되거나 아니면 피해자만 고립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