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책』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아내·엄마가 집을 떠나고
돼지가 된 세 남자 이야기
함께 일하는 즐거움 보여주며
가사 노동의 중요성 드러내

앤서니 브라운이 쓴 『돼지책』 표지.  ©웅진 주니어
앤서니 브라운이 쓴 『돼지책』 표지. ©웅진 주니어

어느 날 엄마는 쪽지 한 장만 달랑 남겨두고 집을 나간다. 남편 피곳 씨와 두 아들 사이먼과 패트릭에게 전하는 쪽지에는 단말마의 비명 같은 한 문장만 쓰여 있었다. ‘너희들은 돼지야’

아빠와 아이들이 처음부터 돼지는 아니었다. ‘피곳 씨는 두 아들인 사이먼, 패트릭과 멋진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멋진 정원에다, 멋진 차고 안에는 멋진 차도 있었습니다. 집안에는 피곳 씨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란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림책 『돼지책』은, 남편과 두 아들이 왜 돼지로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복선이다. 아빠와 두 아들이 멋진 집 앞에 서서 당당히 포즈를 취하는 첫 장면에서, 집 안에서 요리하고 청소하기에 바쁜 엄마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 혼자서 집안일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아빠와 아이들은 엄마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중요한 회사와 학교’에 가기 위해, 빨리 밥을 달라며 입을 떡 벌리는 게 그들의 유일한 일이다. 단 하루도 쉴 틈 없이 엄마가 빨래하고 요리하고 다림질하는 동안에 피곳 씨와 두 아들은 소파에 퍼질러 앉아 TV를 보는 데만 여념이 없다. 그런 아빠와 아이들이 크고 선명하게 그려진 것에 반해, 집 안 일을 하는 엄마는 얼굴도 나오지 않은 채 왜소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Maria Mies)는 가정에서 여성의 노동이 공기처럼 사용할 수 있는 자연자원으로 환원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림책 『돼지책』은 집에서 여성의 노동이 공기처럼 보이지 않게 된 현실을, 그로테스크한 유머로 담아내고 있다. 가족 구성원들이 엄마에게만 집안일이 떠맡겨진 불합리한 현실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변하지 않는 이상, 오로지 밥만 먹을 줄 아는 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통렬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름도 나오지 않은 이 엄마는 집안일을 마친 뒤에 일하러 밖에 나간다!

그런데 아빠와 두 아들이 하루아침에 돼지로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그들의 모습이 돼지로 온전히 변하기 전에 악천후의 징조는 집안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는 동안에 소파에 앉아 TV 보는 것에만 골몰한 아빠와 아이들 앞의 테이블 위에 놓인 돼지 저금통을 비롯해서 전기 콘센트도, 문손잡이도, 벽지의 꽃무늬도 돼지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우리 안의 만성화된 가부장적인 통념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여성인 엄마만 가족을 돌보며 살림을 해야 한다는 성 고정관념이 우리 안에 피부처럼 들러붙어 있다는 걸 말해주는 동시에, 습관처럼 익숙해져 버린 가부장적인 고정관념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야만 집 안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돼지들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엄마의 부재로 엄마가 너무도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일까? 돼지 아빠와 돼지 아이들은 엄마에게 제발 집에 돌아와 달라고, 무릎을 꿇고 킁킁거리며 부탁한다. ©웅진 주니어
엄마의 부재로 엄마가 너무도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일까? 돼지 아빠와 돼지 아이들은 엄마에게 제발 집에 돌아와 달라고, 무릎을 꿇고 킁킁거리며 부탁한다. ©웅진 주니어

지난해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 복지 실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배우자가 있는 기혼 여성 10명 중 7명 이상이 남편이 밖에서 돈을 벌고 아내가 집에서 가족을 돌본다는 전통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에 반대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과거에 비해 여성들의 의식은 변화하고 진보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도 살림도 완벽하게 해내는 슈퍼우먼을 사회에서는 훌륭한 덕목처럼 기대하고 원한다.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가 신봉하는 모성 신화는 모든 여자는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이야기한다. 덕분에 집안일도 집 밖 일도 완벽하게 하는 슈퍼우먼이라는 환상은, 아주 오랫동안 여성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엄마에게만 당연하게 집안일이 떠맡겨질수록 다른 가족들은 점점 돼지로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빠와 아이들이 자신들이 사는 집을 돼지들이 살기에 딱 어울리는 돼지우리로 만들어 버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터.

먹을 게 하나도 없자 음식찌꺼기라도 먹겠다고 웅크린 돼지 아빠는, 그 순간 집에 온 엄마가 커다란 그림자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에 대비되어 작고 초라하다. 엄마의 부재로 엄마가 너무도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일까? 돼지 아빠와 돼지 아이들은 엄마에게 제발 집에 돌아와 달라고, 무릎을 꿇고 킁킁거리며 부탁한다.

엄마가 집에 돌아오고 나서 가족들이 그동안 엄마가 혼자 도맡았던 집안일을 나눠서 하기 시작하자, 아빠와 아이들은 돼지에서 사람으로 돌아오고, 엄마도 비로소 얼굴을 되찾는다. 그전까지 빛바랜 색의 이미지로, 고개 숙인 채, 또는 등 돌린 채 보이지 않았던 엄마의 얼굴은 이제 크고도 뚜렷한 모습이 되어 당당하게 정면을 바라본다.

그런데 빨간색 옷을 입은 엄마가 빨간색 차를 수리하는 마지막 장에 보이는 차 번호판이 심상치가 않다. 거꾸로 읽으면 123 PIGS(돼지)가 아닌가! 고장 난 자동차를 고치듯, 엄마는 아빠와 아이들을 변화시킨 것이다! 가부장적인 성 고정관념이 잘못된 것임을, 집 안 일을 집에 사는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나눠서 하는 것이, 당연히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가치라는 걸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그런 엄마 덕분에, 아빠와 두 아들은 돼지가 아닌 사람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어서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윤정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공연을 만들어 올리는 작가다. 독서치료사로서 10년 넘게 그림책 치유워크숍 활동을 해오고 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보는 문화예술 비평 작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주요 저서로는 『조금 다르면 어때?』 『팝콘 먹는 페미니즘』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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