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있는 그 곳에 사람이 산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18번가 마을

주민들 사비 털어 건물 사서 리모델링
마을만들기위원회 만들고
젊은 사진작가가 탄광마을 사진전
자장면데이, 전액 마을에 기부
높은 고층 빌딩 호텔이 아닌
늘어선 마을 호텔 곧 개장

고한읍 18번가 마을의 2018년 1월 모습, 곳곳에 옛날 집들이 남아 있다.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고한읍 18번가 마을의 2018년 1월 모습, 곳곳에 옛날 집들이 남아 있다.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고한읍 18번가 마을 최근 모습, 집들이 깔끔하게 리모델링돼 있다.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고한읍 18번가 마을 최근 모습, 집들이 깔끔하게 리모델링돼 있다.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미국에 ‘34번가의 기적’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18번가의 기적’이 있다. 34번가는 크리스마스가 배경이고 18번가는 작은 시골마을이 배경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이 둘 사이엔 공통점이 너무 많다.

첫 번째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위대한 이야기다. 두 번째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묵묵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나가고 있다. 마지막은 해피엔딩을 만들며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아주 기분 좋은 선물을 준다.

34번가의 기적을 뒤로 하고 18번가의 기적을 만나러 강원도 정선의 한 시골마을로 갔다. 행정구역 주소는 정선군 고한2길 15다. 고한읍 18번가 마을만들기위원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김진용씨 일터다. ‘하늘기획’ 이라는 디자인‧인쇄 전문업체다.

“우리 마을은 마을 이름도 없었어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 60년대 초반부터 탄광이 개발되고 사람들이 몰리면서 고한 1리부터 늘어나는 인구에 따라서 36리까지 생겼다고 해요. 지금은 20리까지만 남아 있어요. 그리고 인구는 최고 7만명까지 갔다가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현격하게 줄어서 현재는 1만명 이하예요.”

김 사무국장이 마을 역사를 먼저 설명했다. 정선은 태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 석탄 산지였다. 하지만 2000년 전후로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은 급격하게 쇠락해 갔다. 고한도 마찬가지였다. 탄광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고한읍에 ‘강원랜드’가 들어섰지만 고한읍 주민들의 삶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어려워졌다.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대형리조트에만 사람이 몰려 마을이 더 초라해져 갔다.

18번가의 기적을 만들어 낸 선장 유영자 이장.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18번가의 기적을 만들어 낸 선장 유영자 이장.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빈집이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할 때 새롭게 마을에 여성 이장이 뽑혔다. 고기집을 운영하는 유영자 대표였다. 유 이장은 엄마의 마음으로 마을을 알뜰살뜰하게 보살폈다. 새벽에 나와 골목에 버려져 있는 담배꽁초를 줍고 쓰레기를 치웠다. 우선 마을을 깨끗하게 꾸며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몇몇이 유 이장과 뜻을 같이 했다.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을 하면서 마을 사람을 모아서 무언가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마을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탄광이 없어졌지만 막장에서 탄을 캐는 일을 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유 이장과 김 사무국장 등 몇 명이 작은 일을 하나 꾸몄다. 자신들의 사비를 털어서 200만원을 모으고 자원봉사자를 결합해서 마을에서 가장 낡은 집을 리모델링해줬다.

유 이장은 “이씨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이었는데 너무 낡고 불편해서 보고 있는 저희들도 마음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주민들이 뜻을 모으고 돈을 모아서 리모델링을 해 드렸어요. 내부 수리를 깨끗이 해 드리고 외부의 페인트도 새로 칠하고 동네 화가의 도움을 받아서 예쁜 그림도 그려 드렸어요.”

마을 부녀회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꽃꽂이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마을 부녀회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꽃꽂이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이렇게 한 집을 바꾸고 나니까 마을 주민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아 모두가 움직이면 우리 마을도 뭔가 변화할 수 있겠구나’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 후로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유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뭉쳐서 ‘18번가 마을 만들기 위원회’가 출범했다. 그것이 지난해 1월이었다. 고한읍 18리가 18번가로 화려한 변신을 했다. 마을주민인 위원회 회원들은 우선 잘 만들어진 마을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서울의 연남동, 성수동, 경리단길 등을 찾아서 요리조리 꼼꼼하게 살폈다.

그 후에 많은 전문가의 도움도 받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회적 기업 ‘세눈컴퍼니’의 김용일 대표다. 김 대표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 파티를 겸한 강의를 했다. 무려 3개월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의 부인(성악 전공)은 남편의 강의를 열심히 듣는 마을 주민을 위해 음악 공연도 했다. 미대를 졸업한 김진용 사무국장의 후배는 리모델링한 집 벽에 예쁜 그림을 그려줬다.

지난해 6월부터 9월까지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 열린 골목 아카데미 모습. 세눈컴퍼니 김용일 대표가 교육하고 있다.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지난해 6월부터 9월까지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 열린 골목 아카데미 모습. 세눈컴퍼니 김용일 대표가 교육하고 있다.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마을 주민들의 열의를 확인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행정가가 있었다. 바로 고한읍장 지근배씨다. 지 읍장은 “고한읍에 20개리가 있는데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을 바꿔 보겠다고 열심히 일하는 곳은 18번가가 으뜸이다. 관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의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지 읍장은 고한읍에서 쓸 수 있는 예산을 모아서 18번가 마을에 낡은 집들을 리모델링해줬다. 그리고 정선군의 도시재생 예산과 국토부 등의 예산을 받을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을 바꾸기에 유 이장, 김 사무국장과 함께 열성적으로 참여한 젊은 여성이 있다. 주인공은 18번가 마을에서 ‘들꽃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20대 이혜진씨다. 그의 고향은 고한의 옆 동네인 사북이지만 도회지에서 경찰법학을 전공한 말 그대로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그런 그가 버려진 탄광촌이자 고향인 고한의 18번가를 택했다.

“제가 어렸을 때 탄광이 없어졌어요. 그런데 탄광지역에 사는 아이라는 이유로 상당히 많은 혜택을 받았어요. 장학금도 받고 서울이나 해외로 연수도 보내주고요. 실제로는 탄광을 보지도 못했는데 이런 혜택을 받으니까 맘속으로 많이 미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녀는 버려진 탄광을 카메라 앵글에 담기 시작했다. 탄광에서 열심히 일을 했을 할아버지와 마을 어르신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드리고 그 시절의 추억을 잊지 않게 해드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18번가 마을호텔 조감도. 마을 입구에 호텔 프론트가 있고 숙소, 중국집, 세탁소, 이발소, 사진관, 식당, 카센터 등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18번가 마을호텔 조감도. 마을 입구에 호텔 프론트가 있고 숙소, 중국집, 세탁소, 이발소, 사진관, 식당, 카센터 등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18번가마을발전위원회

탄광 시설과 버려진 갱도 등을 찾아다니면서 탄광의 옛 모습을 기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진용 사무국장은 혜진씨에게 마을에서 사진전시회를 제안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힘을 주기 위한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는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정선과 태백 등 인근 주민들까지 몰려와 관람을 하고 응원을 해줬다. 무엇보다 가장 큰 힘은 전시회장으로 썼던 고한읍 로터리클럽 건물을 회원들이 마을 회관으로 무상 임대해 줬다는 것이다. 전시회 이후에도 혜진씨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은혜슈퍼 자리를 리모델링해서 ‘들꽃 사진관’을 열었다. 그리고 18번가 마을의 간사가 됐다.

“신혼부부들이 제주도로 촬영을 많이 가는데 이곳도 함백산 야생화가 너무나 예쁘게 피어요. 매년 7월이면 야생화 축제도 열리는데 제주도로 가는 신혼부부의 발길을 강원도로 돌리고 싶어요”라며 웃어 보였다.

혜진씨 이외에도 든든한 후원자가 한명 더 있다. 18번가 마을에서 중국집 ‘국일반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명환씨다. 김씨는 10여전 전에 5대(고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가 살고 있다는 이유로 KBS ‘인간극장’에도 출연한 마을에서 알아주는 유명인이다.

김씨는 마을 리모델링 사업도 적극 돕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마을의 키다리아저씨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본인의 장점인 자장면을 가지고 마을을 돕고 있다.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 ‘자장면 데이’를 한다. 평소 5000원에 판매하고 있는 자장면을 그날엔 반값에 판매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장면 가격이 아니라 그의 마음씨다. 그날 판매한 매출은 전액 마을 발전기금으로 기부를 한다. 300그릇 정도를 판다고 가정하면 월 75만원이다. 1년으로 하면 900만원 가까운 돈이다.

“어릴 때에 탄을 캐는 마을에 살면서 어른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살았는지 그 기억이 머리에 강하게 남아 있어요. 저는 탄광에 가기 싫어 자장면을 배웠고요. 작은 기술이라도 마을 어르신들에게 힘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장면 데이를 시작했어요.”

18번가는 지속적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새로운 모델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마을 호텔이다. 일반적으로 호텔하면 크고 높은 건물 안에서 자고 먹고 마시고 빨래하는 시설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18번가 호텔은 길과 골목을 따라서 옆으로 긴 호텔이다. 이곳에 잠을 자는 건물이 있고 밥을 먹는 건물과 빨래를 하는 또 다른 건물에 사진을 잘 찍어주는 건물까지 존재한다. 물론 이들 건물은 가까이 붙어 있다. 주민들은 모든 서비스를 호텔급으로 하겠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예산을 받아서 호텔의 메인 숙소 건물이 될 유 이장님 식당이 리모델링 중에 있다. 올해 여름쯤엔 이 호텔이 정식으로 문을 연다.

높이 솟아있지 않고 골목길을 따라 길게 늘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마을호텔. 18번가의 기적은 진정한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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