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속으로] 불뿜는 소리로 다시 태어난 경극의 미학
[공연속으로] 불뿜는 소리로 다시 태어난 경극의 미학
  • 강일중
  • 승인 2019.04.18 14:35
  • 수정 2019-04-18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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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의 신작 초연 ‘패왕별희’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국립극장

중국 고대 초나라의 영웅 항우. 유방과의 해하 전투에서 그는 장수로서는 처음으로 패장(敗將)의 수모를 겪는다. 휘하의 군사들은 완전히 궤멸하고, 연인이자 수많은 전쟁터에서 함께 고락을 나눈 동료이기도 한 우희는 사면초가 상황에서 자결한다. 맹렬히 추격하는 유방의 군사에 내쫓기면서 오강(烏江)에 다다른 항우. 강 저쪽으로 그를 피신시킬 나룻배는 사람과 말 중 한쪽만 태울 수 있을 정도로 작다. 항우는 사공에게 자신 대신 그간 충성스럽게 주인을 지켜온 애마 오추마를 태우고 가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충직한 말은 주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강물에 첨벙 뛰어든다.

“오추마는 나를 위헤 몸을 던져 죽었고, 우희는 사랑으로 자결하여 그 절개 영원히 남겼네./세상을 뒤덮을 영웅이라지만, 오강에 홀로 남았으니 어찌할 수 있을까./멀리 웅장한 산하를 보니 내세를 기약함이 낫겠구나.”

영웅은 절규하며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신작 ‘패왕별희’(연출 우싱궈,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4월 5일~14일)는 비장미가 매우 짙은 작품으로 내용 면에서는 다분히 고루하고, 신파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깊이 있는 현대적 감각의 무대와 영상, 탄탄한 이야기 구성, 소리꾼들의 불을 뿜는 듯한 소리와 정교한 손놀림과 몸동작 연기 등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작품성을 크게 높였다.

작품은 죽은 항우가 생전 영욕(榮辱)의 세월을 되돌아보며 삶의 무상함을 독백 형식으로 풀어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어 도창 역할을 하는 맹인노파가 등장해 전쟁의 고통을 알리면서 ‘(오강) 강가의 전설’을 어린 항우에게 들려준다. 영웅 항우를 둘러싼 이야기들이다. 맹인노파는 그리스비극의 맹인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연상케 한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국립극장

작품의 끝은 무대 중앙에서 이미 죽은 우희가 자결한 항우의 시신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맹인노파와 병사들, 백성들이 비탄과 허무의 합창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마지막 장면은 작품에서 전개된 모든 이야기를 고밀도로 압축했다.

시작과 끝 장면의 무대는 지극히 몽환적이다. 후면으로 경사진 무대 바닥은 좌우로 길게 커다란 틈들을 통해 갈라져 있고, 무대 뒤로는 영상 이미지로 아주 비현실적인 모습의 커다란 달이 뜬다. 그 사이로 항우의 꿈결 속 우희의 모습이 보인다. 전쟁과 영웅들의 모습을 사막(紗幕)에 투사한 영상을 포함해 작품 속에서 보이는 다양한 시각 이미지들이 인상적이다.

창극 ‘패왕별희’는 이미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 ‘패왕별희’와는 내용이 사뭇 다르다. 동명의 경극(京劇) 서사를 따른 것이다. 거기에 중국의 전통 경극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데 앞장서온 대만의 유명 연출가 우싱궈가 무대화를 맡은 만큼 경극의 요소가 많이 녹아 있다. 특히 많은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정교한 손가락 놀림, 걸음걸이, 배우들의 제스처 등 경극의 중요한 특징들이 창극 배우들의 연기 속에 반영됐다. 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전통 공연양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국립극장

이번 공연에서 처음에는 항우의 대역 배우로 캐스팅됐다가 연습 과정에서 정식으로 항우 역을 맡게 된 객원배우 정보권의 연기는 빼어났다. 에너지 넘치는 소리와 아주 세밀한 부분에서의 완성도 높은 몸동작이 조화를 이뤄내면서 슬픈 영웅의 이야기를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 우희 역을 김준수 배우가 맡은 것은 경극에서 여자 역을 남자가 맡는 전통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는 손놀림 등에서는 기대 만큼의 정교한 연기를 보이지 못했으나 항우 앞에서의 검무 장면은 숨을 멎게 할 정도의 고혹적인 춤 자태로 주어진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냈다. 중견 김금미 배우가 맹인노파의 역을 맡아 구성진 소리로 깊은 감동을 준 것을 비롯해 국립창극단의 많은 배우들이 고르게 좋은 연기를 보였다.

또 하나 돋보인 점은 작품 제작 과정에서 작창과 음악감독을 맡은 이자람의 역할. 그는 영웅과 전쟁,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소리와 그 노랫말 속에 민중의 정서를 잘 반영해 풀어냈다. 전쟁의 잔인함, 도탄에 빠진 백성의 이미지가 배우와 코러스의 창, 그리고 장면 곳곳에서 엿보인다. 판소리 ‘적벽가’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들이다. 11명의 국악기 연주자가 오케스트라피트에서 만들어내는 음악 역시 장면의 잔상들과 함께 심금을 울렸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국립극장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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