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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학자들은 노인의 행복감이 이동능력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보고한다. 즉 노인이 되면 이동능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그런 능력을 상실한 경우에는 불행감을 더 느낀다는 것이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이가 들수록 건강한 다리가 필요하고, 또 운전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전에야 여자들은 집안에서만 이동하면 됐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세상은 넓고 할 일과 볼거리도 많으니까. 그런데 나는 여자들의 이동능력처럼 꼭 필요한 게 남자들의 ‘요리 능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요리를 할 줄 아는 남자와 그렇지 못한 남자들의 노년은 하늘과 땅처럼 다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사하시 게이죠의 <할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집안일은 여자만이 하는 것으로 알고 83년을 살아온 할아버지가 아내의 죽음 이후 스스로 집안일을 배우면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홀로서기가 노년에도 필요하다는 것과 함께, 특히 남자노인들에게 부엌일을 통한 홀로서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꼈다. 특히 책 뒷부분에는 이 책의 출판 후 일본 각지에서 날아온 독자편지를 통해서 늙어서 밥짓고 빨래하면서 혼자서 살아가는 80대, 90대의 ‘부엌할아버지’들을 작가가 직접 만나 취재한 내용도 포함돼 있어서 흥미로웠다.

이 책이 씌어진 때가 1980년대 초반이니까 일본의 노인인구 비율이 10%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노인인구 비율(약 8%)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홀로 사는 여자노인들이 절대 다수이지만, 앞으로는 홀로 사는 할아버지도 늘어날 것이고, 이들의 홀로서기를 위한 부엌일의 중요성도 대두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왜 꼭 ‘할아버지의 부엌’이어야 하는가? 부엌은 할아버지가 되기 전, 말하자면 인생의 어느 시기에도 중요한 곳이다. 또 부엌이란 이 책의 할아버지처럼 아내가 죽은 후 홀로 되어서만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나는 남자들도 일생 부엌과 친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늦어도 중년기가 되면 요리실력까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시 퇴직하면 그 때부터 요리를 배우겠다고 생각하는가? 이해는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57세에 예상보다 빠르게 은행에서 퇴직한 L씨는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황량한’ 퇴직생활의 여러 측면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밥 혼자 먹는 것’에 대한 문제였다. L씨는 7시쯤 일어나 요가 등 운동을 열심히 한다. 그리고 10시쯤 아내와 함께 늦은 아침을 든다. 그러고 나면 아내를 찾는 전화가 여기 저기서 걸려오고 아내는 외출준비를 시작한다. 결국 점심은 거의 매일, 그리고 저녁은 자주 혼자 먹는다는 것.

“요즘 여자들은 밥하는 걸 무척 싫어해요. 심지어 아들, 며느리가 오는 것도 밥해주기 부담스럽다고 싫어할 정도예요, 아들네가 온다고 하면 오늘은 당신이 쏘시라며 외식을 하자고 하지요.”

L씨는 그렇다고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아내의 외출을 말릴 생각도 없다고 했다. 저녁에도 대부분 자기 쪽에서 먼저 “놀다 오라”고 말하는 편이다. 하지만 혼자 밥 먹는 게 고역이라는 것이다. 생전 들어가지 않던 부엌에 들어가서 주섬주섬 먹을 것을 챙기는 자신의 모습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친구들도 대부분 비슷한 처지여서 요즘 들어 “밥 먹었니?” 하는 전화 인사가 부쩍 늘었다. L씨가 살고 있는 분당에는 중년 후기(아직 노인이 아니다!)의 남자들이 저녁에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고도 했다.

L씨의 얘기를 듣고 나는 오랫동안 여자들만의 영역이었던 ‘부엌’과 여자들만이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던 ‘밥’,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직장으로 학교로 떠나간 후 ‘혼자 먹는 밥’이 이제는 남자들에게도 중요한 것으로 부각됐음을 실감했다. 그것들은 마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하는 숙제이기나 하듯이 결국 모든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평생고용했다고 믿은 요리사가 나이 들수록 외출도 잦고, 여차 하면 아주 그만둘 수도 있는 처지이니 어쩌겠는가? 이왕이면 상황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이제 중년 이상의 남자들에게 요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과목이다. 혼자 집에 있게 된 점심시간에 즐겁게 요리를 만들어 맛있게 먹고,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와 딸에게도 대접한다면? 나는 확신한다. 이런 가정에 황혼이혼이란 없다고.

설사 이혼을 당한다 해도, 사별한다 해도 이런 남자는 덜 불쌍하다. 혼자 시장 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시간도 빨리 가고 하루가 즐겁다. 게다가 서점마다 잔뜩 쌓인 요리책을 보면서 새로 음식 만드는 법을 익히는 재미 또한 여간 쏠쏠치 않을 것이다. 가끔 혼자 먹는 게 너무 쓸쓸하게 느껴질 때면 점심 혼자 먹는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솜씨도 과시한다. 아마 인기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경쟁률이 치열해서 고민이겠지만 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결혼하고 싶지 않거나 맘에 쏙 드는 여자가 없는데도 밥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허겁지겁 재혼하는 친구들을 맘껏 비웃어 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요리를 할 수 있다면 요리사 아내를 구하는 잘못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제안하고 싶다. 나이 드는 남자들의 복지를 위해서 음식 만들기를 가르치는 공적, 사적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겨야 한다고. 음식은 삶의 질을 높여주는 중요한 수단이며, 요리실습은 많고 많은 평생교육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유용하고 실용적인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밖에서 배울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 정다운 부엌에서 아내와 ‘함께’ 음식을 만드는 남편은 몇 배나 더 현명하다.

한혜경/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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