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불태워버린 공주 옷 벗고
종이봉지 입은 엘리자베스가
탈코르셋으로 진짜 나를 만난다

영국의 그림책 작가 재키 플레밍은 ‘여성을 철저하게 배제해온 주류 역사가 여성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의도적인 문화 기제임을 깨달은 뒤 그림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윤정선 작가가 가부장제 사회의 주류 시선인 남성 중심적 관점이 아닌, ‘다르게 보는’ 시선의 중요성을 환기하며 그림책 속 페미니즘을 이야기 한다. <편집자 주>

『종이봉지 공주』 한 장면. @비룡소
『종이봉지 공주』 주인공 엘리자베스 공주는 용이 옷을 불태워버리자 종이봉지로 몸을 가리고 왕자를 구하러 길을 떠난다. @비룡소

엘리자베스는 종이봉지를 입은 공주다. 하지만 처음부터 종이봉지를 입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사는 성에는 예쁘고 좋은 옷들이 많았으니까. 어느 날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용은 성을 가뿐히 부수고 뜨거운 불길을 내뿜어 공주의 옷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공주와 결혼하기로 했던 왕자까지 잡아가 버린다. 입을 옷이 하나도 없었던 엘리자베스는 마침 눈에 띈 종이봉지를 주워 입는다. 용 덕분에(?) 그녀는 본의 아니게 탈코르셋을 한 것이다. 탈코르셋은 지난해 화장, 다이어트처럼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규격화된 미적 기준을 벗어나자는 취지로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이다.

용이 입으로 뿜어낸 불로 한순간 재가 되어버린 공주의 옷들이 가부장제 사회가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주입했던 성 고정관념의 부산물처럼 보이는 건, 꽤나 자연스럽다. 생명이 위협받는 위중한 순간에도 하늘하늘한 드레스는 최소한의 보호도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엘리자베스는 공주란 사실을 증명해주는 화려한 드레스 안에 갇혀 살았을 뿐이다.

과거 코르셋을 착용했던 여성들은 몸을 옥죄는 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 과도하게 허리를 조였기 때문인데, 숨 쉬기도 힘들게 만들었던 코르셋으로 뼈가 부러지는 여성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오랫동안 코르셋을 벗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코르셋은 여성들이면 누구나 의당 입어야 하는 속옷으로 강요시 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여성운동가들이 여성복도 남성복처럼 간소화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헐렁한 바지 위에 짧은 치마를 입는 편안한 여성 옷이 나왔는데, 미국 여성 아멜리아 블루머(Amelia Bloomer)가 처음 만들었다고 해서 블루머라고 불렀다. 당시 코르셋을 벗고 블루머를 입었던 일부 여성들은 온갖 조롱과 비난을 받아야 했다. 단지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았단 이유로, 그녀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더는 ‘올바른 숙녀’로 존중받을 수 없었다.

『종이봉지 공주』로버트 먼치 글/ 마이클 마르첸코 그림 @비룡소
『종이봉지 공주』로버트 먼치 글/ 마이클 마르첸코 그림 @비룡소

그렇다. 여성이 주체적인 나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화석처럼 굳어진 성고정관념과 싸우는 일일 것이다. 얼핏 수의처럼 보이는 칙칙한 종이봉지로 겨우 몸만 가린 채 왕자를 구하러 엘리자베스가 용을 찾아 나선 길은 그래서, 그 전의 ‘나’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길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용과 싸우는 장면이 여느 영웅 서사들과 다르다. 수많은 신화와 동화 속에서 칼과 창으로 용을 찔러 죽이는 왕자들과는 달리 엘리자베스는 오로지 기지와 지혜를 발휘한 말로써 용을 물리친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에서 영웅은 용이나 뱀으로 상징되는 우주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분이 되는 생명 에너지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임무를 띤다고 바라보았다.

그런 점에서 그림책 『종이봉지 공주』의 영웅은 왕자가 아니라 공주다. 왕자가 용을 죽이고 공주를 구해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서사를 엘리자베스는 과감히 깨뜨려 준다.

흔히 여자아이는 분홍색 옷, 남자아이는 파란색 옷을 입혀야 한다는 성 고정관념은 놀랍게도 20세기 들어서야 등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1700년대 유럽에서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년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에,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용으로부터 구해준 공주를 대하는 왕자의 태도가 정말 무례하기 이를 데 없다. 어이없게도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 오라’면서, ‘공주의 행색이 엉망’이라는 맨스플레인을 엘리자베스에게 마구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 로널드, 넌 옷도 멋지고 머리도 단정해. 진짜 왕자 같아. 하지만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파렴치하기까지 한 왕자의 태도에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통쾌하게 응수하는 엘리자베스. 마지막에 혼자 신나게 길을 떠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앞으로 그녀가 새롭게 태어날 것을 충분히 예감하게 해 준다. 보기만 해도 몸이 오그라드는 용을 직면함으로,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진짜 뭘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용과 싸워 이긴 용기 있는 경험은, 앞으로 누군가 그녀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라고 강요할 때마다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물론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지 않았다.

 

윤정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공연을 만들어 올리는 작가다. 독서치료사로서 10년 넘게 그림책 치유워크숍 활동을 해오고 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보는 문화예술 비평 작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주요 저서로는 『조금 다르면 어때?』 『팝콘 먹는 페미니즘』(출간 예정)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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