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여성들
김순애, 남편 김규식과 임정 외곽 조직 다수 설립해 지원
김마리아, 1922년 의정원(국회) 최초의 여성으로 당선
정정화, 목숨걸고 압록강 건너 한-중 오가며 거액 모금

김순애, 김마리아, 정정화 지사(왼쪽부터)
김순애 지사, 김마리아 지사, 정정화 지사(왼쪽부터)

1919년 4월 11일, 대한‘제국’이 소멸된지 9년 만에 국민의 나라인 대한‘민국’이 수립됐다. 중국 상해에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정했다.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해 국가 운영의 기틀을 잡았다.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정치기구인 국무원과 임시의정원에 이름을 올린 절대다수는 남성이다. 임정 수립 당시부터 1948년 해산 때까지 여성의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행정부인 국무원에는 국무총리 이승만부터 안창호, 김규식, 이동휘 등 6부 총장(장관)은 물론 이후 국무위원의 명단에도 여성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여성의정에 따르면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에는 마지막 회의가 폐회할 때까지 김마리아 선생을 포함해 여성 의원은 7명만이 활동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30년 간 안팎에서 여성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조직이 과연 제대로 운영될 수 있었을까. 임정의 역사 속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스스로 해외 망명을 택하고 헌신한 여성들이 있지만 요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인 김순애·김마리아·정정화 지사를 소개한다.

김순애, 남편 김규식과 임정 외곽 조직 다수 설립해 지원

김순애(1889~1976, 독립장) 지사는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의 아내로 부부 독립운동가였다.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역사와 지리를 몰래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깨우치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힐 위기에 놓이자 1911년 만주로 망명, 1919년 김규식과 결혼해 상하이로 이주해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위한 조직 구성에 나선다.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이사를 맡고 같은 해 7월 상해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아 나라 안팎의 여성단체와 연계해 항일운동을 펼친다. 1920년 1월에는 무장투쟁적 성격을 띠는 임시정부 외곽단체 ‘의용단’을 조직했다. 한인 동포 단체인 대한인거류민단의 의원으로 선출돼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후원한 것도, 대한적십자를 조직해 간호원양성소를 열어 독립전쟁에 필요한 의사 양성 지원을 시작한 것도 이때다. 1926년에는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발족해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 지원에 힘썼다.

김마리아, 1922년 의정원(국회) 최초의 여성으로 당선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 중 한명인 김마리아(1892~1944, 독립장)도 항일독립여성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 전신인 임시의정원 최초 여성의원으로 활약했다.

김마리아는 교사로 일하다 일본에 건너가 1919년 동경 2·8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귀국 후 붙잡혀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한다.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는 취지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거나 투옥된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 등에도 힘썼다. 그 일로 체포돼 옥살이한 그는 1921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독립신문’은 이 일을 ‘선거계의 신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여자로서 의원에 당선된 것은 우리 선거계에는 물론 이번이 처음일 뿐더러 세계열국을 통하여서도 이것이 아직 몇 째 안 가는 희귀한 일”이라고 기사화했다.

정정화, 목숨걸고 압록강 6번 건너 독립자금 조달

정정화(1900~1991, 애족장) 지사는 상해 임시정부의 안 살림꾼으로 불린다. ‘정정화의 밥을 안 먹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다. 중국 망명 27년 동안 자신의 가족 뿐 아니라 이동녕, 백범 김구 등 임정요인 및 그 가족들을 돌보며 임정 요인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였다. 『장강일기』라는 제목의 회고록은 임시정부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정정화는 시아버지인 대동단 총재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자 혼자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으로 1930년까지 10년간 열악한 재정 지원을 돕기 위해 6회에 걸쳐 압록강을 건너 중국과 국내를 오가면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간부를 맡았고 충칭의 3·1 유치원 교사로도 근무하며 독립운동가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1943년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이 되는 등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이밖에 이회영 선생의 부인이자 ‘서간도 시종기’를 쓴 이은숙 선생, 임정 초기 국무위원을 지낸 이상룡의 손주 며느리인 허은 지사, 김구 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 지사,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지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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