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님이
그 힘든 여정에서도
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담대한 윤영자 사모님
든든한 지원 덕

“긴 세월에 걸친 문필가로서의 나의 인생의 마지막 저술이 될 이 자서전을, 결혼 이후 50년 동안 자신을 희생하며 오로지 사랑하는 자식들과 못난 남편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힘겹게 극복하고, 굳건한 의지로 헤쳐 온 존경하는 아내 윤영자에게 바친다.” 리영희 선생님은 마지막 저서 ‘대화’의 첫 페이지를 이런 헌사로 시작하셨다. 존경받는 저술가이자 민주투사가 자신을 “못난 남편”이라고 하면서 존경하신 그 부인은 어떤 분인가. 사실 나는 만나 뵙기 전부터 사모님의 팬이 되어 있었다. 전해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시절, 언론을 틀어쥐려는 정권에게 민주언론을 지키려는 언론인들은 눈엣가시였다. 권력은 정보부서를 총동원하여 다양한 공작을 펼쳤는데, 그중에는 가정을 파괴하려는 비열한 시도도 있었다. 어느 날 사모님이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으니, 댁의 남편이 요새 이러저러하게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데 알고 있냐고 하더란다. 이것이 모함임을 눈치챈 사모님은 “그래요? 우리 남편이 여자들한테 그렇게 인기가 있어요? 뭐, 좋은 일이네요”라고 답하고 끊어버리셨다고 한다. 얼마나 담대한가! 신념과 도덕을 지키며 사는 남편에 대한 신뢰를 천명하고 공작 따위에 벌벌 떨지 않고, 오히려 악당들에게 무안을 주신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완전히 반해서 꼭 한번 뵙고 싶었다.

운 좋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게 되어 가끔 찾아뵙고 지내 얼마나 좋았는지. 내 상상 속의 여걸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사모님은 보통 체격에 평온한 얼굴로 잘 웃으시는 분이었다. 늘 이야기에 활발히 참여하고 유머도 던지셨다. 감시와 공작을 같이 견디고, 투옥 당하면 가족을 홀로 지키고, 해직 당하면 생활고를 버텨 가면서 긴 세월 고난을 같이 겪으신 분이 그 상처를 어떻게 이겨내고 저렇게 밝고 씩씩하실까 존경스러웠다.

윤영자 선생님께 존경의 마음을 담아 드린 ‘민주화 디딤돌 상’ 사진. ⓒ정진경
윤영자 선생님께 존경의 마음을 담아 드린 ‘민주화 디딤돌 상’ 사진. ⓒ정진경

선생님은 지난 세월에 대해 사모님께 미안해 하셨다. 독재에 당한 고생에 더해서, 그 엄혹한 시절에 독재와 싸우느라 자신이 무척이나 날카로웠던 것에 대해서도. 선생님이 그 힘든 여정에서도 긴 세월 일에 매진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사모님의 든든한 지원 덕이다. 연세 드시면서 선생님은 마음의 빚을 갚으려 노력하셨다. 은퇴 후 사모님과 여행 다니려고 운전도 배우시고, 강한 성격을 눅여 사모님께 맞추려고 노력하셨다. 사모님이 병환으로 심히 앓으실 때, 문안드리러 간 우리에게 팔순의 선생님은 “한 오년만 더 같이 살았으면” 하셨다. 마음이 찡했다. 사모님은 건강을 찾으셨는데 선생님이 먼저 가셨다. 사모님은 오랜 시간 무척 힘들어하셨지만, 지금도 선생님의 서재를 그대로 유지하고 의연하게 지내신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위인과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물며 그가 영달이 아닌 고난의 길을 간다면, 더더욱이나. 그럼에도 역사는 대부분이 여성인 그들을 별로 기억해주지 않았다. 수많은 독립투사의 가족들이 그 투쟁에 함께한 것을 인정하고 마땅한 경우에는 같이 서훈해야 한다는 주장이 3.1혁명 100주년에 새로이 일어나고 있다. 늦었지만 해야 할 일이다. 한국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남편과 함께 온갖 고난을 나누어지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신 윤영자 선생님께 우리 부부는 몇 달 전 존경의 마음을 담아 ‘민주화 디딤돌 상’을 만들어서 드렸다. 이런 기록이라도 남겨서 한국여성사의 한 페이지에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분으로 올려 드리고 싶다. 그 공로가 묻혀버리지 않도록. 상을 드렸으면 부상은 무어냐고들 묻는다. 그건 비밀.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