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산권·건강권·평등권서 도출
낙태범죄화 성별따라 편향적 효과

박수진 변호사
박수진 변호사

 

여성들의 이목이 헌법재판소에 쏠려 있다. 6년 만에 다시 헌법재판소로 간 낙태죄에 대한 선고가 4월 중에 있을 예정이다. 1973년 낙태를 합법화한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의 주된 위헌논증은 프라이버시권 침해이다. 하지만 낙태 합법화의 근거는 프라이버시권에 국한되지 않는다. 임신을 중단할 권리는 재생산권, 평등권, 건강권 등 다양한 근거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이 중 가장 주목을 요하는 대목은 평등권이다.

평등권으로서의 임신중단권리는 미국도 여전히 연방대법원 판결의 반대의견 및 보충의견으로만 인용된 논증이어서, 과연 우리 헌법재판소가 이번 결정문에 평등권 논의를 담을지 미지수다. 하지만 가장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낙태합법화의 논거는 평등권에 기초한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소신이기 때문에, 이번 판결에서 평등권 인용여부가 가장 기대되고 궁금한 부분이다. 성적 평등의 관념에 근거하여 임신중단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판시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이른바 ‘케이시(Casey)’ 판결(1992년)의 핵심은 아래 인용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중절하지 않고 임신을 계속 유지하는 여성은 오롯이 그 여성 혼자서 져야만 하는 불안, 신체적 제약, 고통을 겪는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이런 희생을 여성이 기품과 자부심으로 견뎌왔고, 그 기품과 자부심이 사회에서 인정 받아왔으며, 또 이런 희생이 아이에게 사랑의 유대를 준다는 점만으로는, 국가가 여성에게 그 희생을 견디라고 강요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중략) 각 여성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자신의 도덕률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에 대한 그 여성 스스로의 판단이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이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지난해 5월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낙태죄 공개변론과 이해관계인인 법무부의 의견서는 낙태규제가 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이 아니라 신체적·생리적 차이로 인한 불가피한 차별취급일 뿐이어서 평등권 침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여성의 자궁을 단순한 신체적 특징으로, 즉 사회와 무관한 자연적 실체로 전제한다. 과연 그런가? 미셀 푸코가 지적했듯이, 근대사회에서 자궁은 국가의 인구 정책의 규제가 가장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장소였다.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고도성장기는 둘만 낳아 잘 살자며 출산을 억압했고, 지금은 저출산이 망국병이라며 자궁을 닦달하고 있지 않은가.

자궁의 재생산 역할에 대한 한국의 사회적 인정은 임신 및 출산을 ‘축복’하는 선에 멈춰 있다. 여성만이 자궁을 갖고 있기에, 출산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사회적 재생산의 일차적 주체이기 때문에 따라오는 ‘사회적 현상’이다. 하지만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우리사회의 온전한 가치인정은 출산의 사회적 효용에 대한 인정을 넘어, 여성이 사회적 주체로서 임신중단의 결정까지 할 수 있는 권리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즉 국가와 법은 낙태(규제)로 인한 여성의 성차별적 현실과 고통을 사회적 권리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여성만이 임신을 겪는 것을 신체적 차이에서 비롯한 불가피한 부담으로 치부하는 것은 자궁을 출산할 땐 사회적인 것으로, 낙태할 땐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중적 태도이다. 권리의 순간엔 ‘내 것’이었다가 책임의 순간엔 ‘네 것’이라고 말하는.

낙태를 범죄로 처벌하는 규정은 성별에 따라 대단히 차등적인 효과를 가져 온다. 예를 들어, 출산을 원치 않는 여성이 어머니가 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범죄행위인 선택하고 형사처벌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밖에 없다. 또 불법 낙태경험은 이혼시 상대방에 의한 공격 빌미가 되거나 데이트 폭력의 한 수단으로 악용된다. 영향력과 결과에 있어 명백하게 한쪽 성별에 편향적이며, 사법절차 안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하여 취약하고 종속적인 지위에 놓이도록 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곧 있을 선고에서 이러한 낙태규제의 성별 편향적 효과를 인정하고 임신중단을 성평등을 위한 권리로 인정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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