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노래 속 여성은 세 명뿐
여성 롤모델 절대적 부족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당 공동운영위원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신지예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나의 첫 롤모델은 세일러문이다. 세일러문이 친구들과 함께 우주를 돌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하고 여왕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모습은 정말인지 통쾌했다. 세일러문이 악당을 물리칠 때마다 나는 침대에서 방방 뛰며 그녀를 응원했다. 나도 저렇게 멋지게 나쁜 놈들을 해치우고 싶다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고 이따금 내 꿈에는 세일러문이 나왔다.

얼마 전 영화 캡틴마블을 보고 나서 어릴 적 그 기분을 다시 느꼈다. 나는 지금껏 마블 영화가 그리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보통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 히어로의 연애 대상으로 등장해 그를 지원하고 이끄는 조력자에 불과했다. 영화 곳곳에는 보기만 해도 질리는 성적 농담과 무드들이 배치되어 있다. 캡틴마블이 등장하기 전에도 여성 히어로는 있었다. 소위 홍일점을 담당했던 ‘블랙위도우’는 남성 히어로 못지않게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보여줬지만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는 늘 심하게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캡틴마블은 달랐다. 그녀의 성적 매력을 왜곡하여 강조하는 일도, 사랑에 연연하는 모습도 없었다. 영화 마지막에 남성 선배에게 불주먹을 휘두르며 “난 너한테 증명할 게 없다"고 던지는 충고는 그간 여성들이 꾸역꾸역 삼키던 말을 대신해주는 듯했다. 영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나는 극장 의자 위에서 방방 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히어로물에도 이런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다니! 집으로 오는 길에 가슴이 두근거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게 되었다.

현실은 내 마음같지 않았다. 온라인에서는 페미가 묻으면 영화가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자며 캡틴마블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기사 등에서는 캡틴 마블에 대한 악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비슷한 추세다. 미국 네티즌들은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 영화 전문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 ’평점테러’를 일으켰다. 마블 세계관에 무지하다느니, 얼굴이 못생겼다느니, 웃지 않고 시종일관 무표정인 것이 문제라는 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여자는 조종사가 될 수 없다.” “여자가 하기엔 무리다"며 영화 속 주인공이 들었던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편견에 지지 않고 일어서야 했던 주인공의 도전은 스크린 밖에서도 계속된다.

현실세계 여성이라고 다를까. 사실 더 처절하다. 직장에서, 집에서, 또 학교에서 여성들은 매일같이 좌절하고 일어나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상사를 날려버릴 불주먹이 없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초인도 아니다. 세상은 꿈적않는데 덩그러니 나혼자 성폭력, 성차별과 싸우는 것 같으면 견디기 힘들다. 그럴 때는 캡틴마블이라도 봐야 한다. 현실을 버티게 하는 롤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현실의 롤모델이면 훨씬 좋으련만 우리 사회의 여성 롤모델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위인들’ 노래를 불러보면 알 수 있다. 백명 중 몇 명이나 여성인가? 세 명, 신사임당과 논개 그리고 유관순 열사다. 한국 500대 기업 중 여성 임원 비율은 3%로 불과하다. 국회 여성 비율은 17%고, 남녀임금격차는 통계를 낸 이후부터 OECD 꼴찌를 놓친 적 없다. 한국산 유리천장은 너무도 높고 두터워 지난 수십년 동안 깨지기는커녕 흠집만 겨우 난 정도다. 여성 롤모델이 손에 꼽을 정도로 없는 것은 여성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여성 롤모델이 탄생하기 매우 어려운 구조를 가진 사회 자체가 문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캡틴마블이 필요하다. 영화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기업임원, 노조임원, 정치인 등 리더의 자리에 세상이 정해놓은 표준(남성)이 아닌 여성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여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유리천장을 부수고 사회를 바꾸는 모습은 또 다른 여성들에게 지치지 않고 다시 일어설 기운을 줄 것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누구도 스물여덟살짜리 여성 서울시장후보를 주목하지 않았을 때 작가 공선옥씨가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새로운 시대를 부르는 여성들이 등장한다며 나를 ‘신지예들’이라고 호명해주었다. 그 부름을 나도 이어가려 한다. 현재 녹색당은 ‘여성 정치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2020년 총선까지 일년 동안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야망을 잃지 않도록 돕는 플랫폼이 되려 한다. 더 많은 여성들을 정치리더로 호명하고, 그녀들에게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다. 그녀들이 현실에 지지 않도록 하는 든든한 서포터가 될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나도 지치지 않고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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