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프랑코포니의 연극 ‘단지 세상의 끝’

 

‘단지 세상의 끝’ 중 한 장면. ⓒ강일중
‘단지 세상의 끝’ 중 한 장면. ⓒ강일중

집을 떠난 지 10년 만에 돌아온 30대 중반의 아들. 그를 맞아들이는 어머니, 남동생 부부, 그리고 미혼의 20대 여동생. 충분히 예고되지 않았던 장남의 귀환은 이 가족에게는 분명히 엄청난 일이다. 그러나 이들 다섯 가족 구성원들에게 기쁨과 반가움의 표정과 몸짓이 엿보인 것은 아주 잠시. 어색한 인사가 교환된 후 이내 이들의 입에서는 과거 이들을 짓눌렀던 일들에 대한 회고와 함께 서로에 대한 원망과 회한, 그리움, 그리고 자책과 연민의 말들이 어지럽게 뒤섞이면서 쏟아져 나온다.

극단 프랑코포니가 제작한 ‘단지 세상의 끝’(연출 까띠 라뺑)은 어느 일요일, 장남이 도착해 그날 그가 왔던 것처럼 다시 느닷없이 떠나기까지 한나절 이 집안에서 생긴 일을 보여준다.

연극에는 큰 사건이랄 게 없다. 등장인물의 움직임이나 대화가 그리 극적이지도 않다. 각 인물의 대사는 많은 경우 방향성이 불투명하다. 처음에는 특정 상대를 향해 말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선이 점차 초점을 잃고 표류하면서 긴 독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잦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각자가 품고 있는 깊은 마음의 상처와 고독과 불안감이 배어 있다. 암울한 분위기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종종 길고 긴 대사 안에 흐른다.

‘단지 세상의 끝’ 중 한 장면. ⓒ강일중
‘단지 세상의 끝’ 중 한 장면. ⓒ강일중

이 작품의 희곡을 쓴 장-뤽 라갸르스(Jean-Luc Lagarce)는 에이즈로 38세 때인 1995년에 사망한 프랑스 극작가다. 작품 안에는 그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만큼 작가가 살아있을 때 대면해야 했던 어둠과 고독과 절망감이 애절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작품 속 주인공은 루이라는 이름의 장남. 관객은 그가 오래전 왜 이 집을 떠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화자(話者)처럼 마이크 앞에 서서 불치의 병에 걸린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집으로 되돌아갈 계획을 밝히는 프롤로그로 연극은 시작된다. 이어 보이는 것은 과거 장남의 존재와 홀연한 사라짐으로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생긴 정신적 혼란감과 고통, 후회감, 비난·자책 심리 등이다. 때로는 각 인물이 저마다 상대방 탓과 자기옹호에 급급하다. 자신의 천박함에 놀라고, 자책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루이는 자신이 집에 와서 하고자 했던 말을 마음속에 그대로 묻은 채 다시 집을 나선다.

‘단지 세상의 끝’ 중 한 장면. ⓒ강일중
‘단지 세상의 끝’ 중 한 장면. ⓒ강일중

가족 구성원 중에 남다른 존재가 있고, 그로 인해 불편함이나 아픔을 경험한 관객이라면 공감대가 크게 확장될 여지가 있는 내용을 담았다. 내면의 의식 흐름을 그대로 독백체로 옮긴 반복적이고, 운문체의 매우 긴 대사들이 깊은 울림과 함께 다가온다. 형과의 소통부재 속에 자신의 진심과 형에 대한 원망이나 짙은 그리움의 감정을 밖으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채 고통스러워하는 앙트완느의 독백 같은 대사는 10쪽이 훨씬 넘을 정도로 길다.

한 등장인물이 누구를 상대로 얘기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등 대사의 방향성이 불투명한 경우도 종종 있으므로 무대에서 전개되는 장면들이 꿈처럼 비현실성을 띠기도 한다. 루이가 등장하는 에필로그 장면은 그가 자신이 집을 떠난 후 몇 달 후에 죽는다는 내용을 밝힘으로써 흡사 망자가 된 루이가 자신의 과거 모습을 상상하는 것 같다. 중간휴식이 없는 2시간 20분 길이의 이 연극은 중간에 역시 상상이나 꿈속의 모습을 펼쳐내는 것 같은 막간극이 삽입되어 있어 몽환성을 강화했다.

‘단지 세상의 끝’ 중 한 장면. ⓒ강일중
‘단지 세상의 끝’ 중 한 장면. ⓒ강일중

‘단지 세상의 끝’은 불어로 쓰인 희곡을 기반으로 한 연극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는 극단 프랑코포니가 2013년에 국내 초연했던 작품을 이번에 크게 변화시켜 무대에 올린 것이다.

공연은 대학로의 아트원씨어터 3관 무대에서 4월 7일까지.

‘단지 세상의 끝’ 중 한 장면. ⓒ강일중
‘단지 세상의 끝’ 중 한 장면. ⓒ강일중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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