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100년, 3·1운동 100년⑤] 낮엔 물질, 밤엔 야학에서 민족의식 눈 떠
[임정 100년, 3·1운동 100년⑤] 낮엔 물질, 밤엔 야학에서 민족의식 눈 떠
  • 진주원 기자
  • 승인 2019.03.25 00:46
  • 수정 2019-03-25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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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제주해녀항일운동
일제의 강력한 말살정책으로
항일투쟁 중단 속 대규모 시위
3개월간 1만7천명 참여
여성 주도 최대 항일투쟁
파출소 습격해 건물 파괴
일경이 주동자 검거하자
배 에워싸고 흔들어 막아
‘사회 경제적 주체로서 자각’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인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지사(왼쪽부터)
제주해녀항일운동 주역인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지사는 2003년과 2005년 각각 건국포장을 받았다. (왼쪽부터)

24일 아침 제주도 구좌면 세화리 해녀 5백 여명이 세화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야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경관과 충돌되어 경관에 부상자 1명이 나고 순사의 모자를 빼앗고 제복을 찢고 해녀 측에도 부상자가 생기는 등 사태가 험악하야 짐으로 제주각처의 경관을 총소집하고 다시 전라남도에 급보하야 전남경찰부로부터 32명의 경관을… (제주해녀항일운동 사건을 보도한 1932년 1월 26일 동아일보 기사)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이들 중에서 노동자 집단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을 식민 통치한 일제는 정치 주권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침탈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면서 일본 관리자들에 의한 노동력 착취와 자원 수탈이 극에 달했다. 이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일제의 조선 지배 의지를 꺾게 만든 중요한 항일운동이다.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1920년대부터 전국 곳곳에서 전개된 공장 노동자들의 잇따른 파업과 농민·어민 등의 투쟁은 생존권과 민족운동이 결합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함선헌 선생의 말처럼 3·1운동에는 “나도 사람이오”라는 의식이 있었던 셈이다.

특히 제주 해녀들이 주체가 된 제주해녀독립운동은 식민지 시기 여성집단이 주도한 최대 규모의 항일투쟁이자 제주지역의 3대 항일운동이다. 1932년 3개월 동안 총 238회, 참여인원은 총 1만7000여 명에 달한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더욱 강력한 말살정책을 펼치면서 전국적으로 대중 항일투쟁이 중단된 상황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중시위이기도 하다. 또 역사적·시대적 상황에 눈 뜬 민중 여성이 사회 경제적 주체로서 전면에 나선 시위이기도 하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해녀들과 야학 교사들의 기념사진 / 제주도청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해녀들과 야학 교사들의 기념사진 / 제주도청

 

당시 해녀를 상대로 한 일본 어업인들의 수탈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의 잠수기업가들은 제주도 어장의 전복과 해삼류를 남획하면서 황폐화시켰다.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만들어진 해녀어업조합은 1930년에 접어들면서 일본 상인들만을 위한 어용 조직이 됐고, 목숨걸고 채취한 해산물은 시세보다 턱없이 낮게 팔려나갔다.

해녀들의 항일투쟁은 20대 초반의 김옥련(당시 23세)·부춘화(25세)·부덕량(22세) 3인이 주축이 됐다. 부춘화는 구좌읍 하도리의 부인회 회장이었고, 김옥련은 소녀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물질을 하고 밤에는 혁우동맹 산하 야학을 하며 역사적·시대적상황과 민족의식에 눈떴고 사회 경제적 주체로 자각하면서 일제의 착취를 저지하기 위해 해녀들을 단결시켰다.

1931년 12월 하도리에서 벌어진 사건은 제주해녀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일본 물산회사 주재원이 하도리 해산물을 지정된 가격을 무시한 채 싸게 팔 것을 강요했고, 해녀들은 항의서를 제출하기 위해 두차례나 시도했다. 1932년 1월 7일 해녀 300명이 호미와 비창을 들고 시장에 나가 시위에 나섰다. 해녀어업조합장이자 제주도사(도지사)인 다구치 데이키가 순시하는 날이었다. 다구치가 탄 차가 장터에 도착하자 차를 에워싼 해녀들이 ‘우리가 보낸 항의서에 대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들을 몰아내라’고 외쳤다. 일본 경찰들이 칼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진압하려고 했으나 해녀들의 강한 반발에 실패했다. 닷새 뒤인 1월 12일에는 2차 시위가 벌어졌다.

이들의 조직적 저항에 일본 경찰도 가만있지 않았다. 해녀항일운동의 확산을 조기에 차단하려고 목포지역의 경찰대까지 동원해 부덕량과 야학 교사를 포함해 시위 연루자 100명을 잡아들였다. 1월 24일 부춘화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해녀 500여명을 이끌고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를 습격해 건물을 파괴하고 싸움을 벌였다.

이때 일본 경찰 1명과 제주 해녀들이 부상당하고 부춘화 등 주동자 20여명이 체포됐다. 일제는 우도로 피신한 나머지 주동자를 검거해 배에 태웠으나 해녀 800여명이 배를 에워싸고 흔들어 뱃길을 막았다.

부춘화는 해녀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모든 것을 자신이 단독으로 주도했다고 자수한 뒤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2년 7월 석방됐으나 계속되는 일경의 감시와 미행으로 1933년 일본 오사카에 살고 이는 사촌언니 집으로 피신했다. 부덕량은 잡혀 들어가 6개월 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스물일곱의 나이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부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관련 심사 등을 통해 당시 해녀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주요 11명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해 혁우동맹 8인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옥련, 부춘화, 부덕량 등 해녀 3인에게는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세 지사의 흉상은 지난해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내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옆에 설치됐다.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해녀들은 조선시대에 임금에게 진상하던 전복을 바치던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지만, 한국의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직업의식을 갖게 됐고 일제강점기에 항일정신이 결합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게 됐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광복절 기념 축사에서도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박 센터장은 지금까지 제주해녀항일운동이 제대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여성들의 시위라는 점에서 무시하는 인식이 깔려있다”고 했다. 또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 항일투쟁의 의미 대신 생존권 사수의 문제로 여겨졌다는 점, 제주라는 지리적 폐쇄성도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

2019년 1월 12일 제주해녀항일운동 기념행사
제주해녀항일운동 87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1월 12일 제주시 구좌읍 일대에서 열렸다. / 제주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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